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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려니 Apr 10. 2024

2.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시집살이 이야기

커다란 이층집은 늘 적막만이 가득했다. 늘어지고 뒹굴던 우리 집의 공기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 밖에서 보던 웃고 있는 시부모님의 모습은 집 안에서는 보기 어려웠다. 알 수 없는 무표정만이 있을 뿐. ‘아빠의 고민이 이런 거였나?’ 조심스레 짐작하곤 했었다. 꽤 큰 사업체를 운영하던 아버님은 모든 면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분이셨다. 맘먹은 대로 척척 이뤄온 세월의 영향일까, 원하는 것은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단호한 카리스마에 짓눌린 사람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시댁 식구들 모두 조용했다. 비록 수다쟁이는 아녔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입 다물고 있는 신랑도 낯설었다.   

  

새색시의 삶은 단순했다. 하루의 시작도 부엌이었고, 끝도 부엌이었으니.

시집살이 첫날. 새벽 5시 30분. 긴장한 채 선잠에 뒤척이던 난, 알람 소리에 튕기듯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부리나케 앞치마를 챙겨 들고 2층 우리 방에서 부엌으로 후다닥 내려갔다. 어머님은 벌써 나와 계셨다. 쌀이 있는 위치, 밥통 사용 방법, 꺼내야 하는 반찬, 만들어야 하는 반찬, 그릇의 위치 등등. 두 번 묻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해 가며 정신없이 거들었다. 아침상이 차려지는 시간은 6시 30분이어야 했다. 7시가 아버님과 아버님 회사에서 사원으로 일하는 남편의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면 대문까지 배웅을 가 인사를 드리고, 다시 들어와 식탁을 치웠다. 

어머님은 9시면 운동을 위해 스포츠 센터로 가셨다. 그렇기에 어머님의 식사 시간은 8시 30분. 출근 배웅과 어머님의 식사 시간 중간에는 한 시간 반의 뜨는 시간이 있었다. 눈치껏 어머니 말동무를 해 드리거나, 방으로 들어가 모자란 잠을 보충하거나 그런 식으로 때웠다. 그러나 소심한 며느리와 무뚝뚝한 시어머니 사이에 오고 갈 말이 뭐가 그리 있겠는가. 차차 방에서 쉬는 시간으로 굳어져 갔다. 

모두가 나간 9시 후면 집 청소를 시작했고, 어머님이 점심을 드시고 오시면 혼자, 안 드시고 오시면 같이 먹을 점심을 차렸다. 오후에는 어머니를 도와 그때그때 집안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돌아서면 어느덧 저녁 식사 준비를 할 시간. 도돌이표 같은 나의 하루 일과였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철들기 전에 결혼시켜야 한다. 뭣 모를 때 보내야 한다. 이런 무식하고 돼먹지 못한 말이 있었다. 보통은 세월이 흐를수록 옛말에 감탄하며 무릎을 친다. 그들의 현명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한 사람 인생이 좌우될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실제로 우리 윗세대는 이런 막말을 진리인 양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진지하게 해댔다. 멀리 찾을 것 없었다. 우리 부모님 또한 그런 부류에 속한 분이었으니. 나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거지 같은 옛말을 진지하게 따른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누가 한 말인지 면상 한번 보고 싶다. 닥치고 꺼지라는 조언도 함께. 25살의 결혼. ‘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보다 ‘잘 할 수 있어’ 자신에 찬 결혼이었다. 철이 없었다. 뭣 몰랐다. 무모한 자신감이었다는 걸 깨우치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시집살이 첫날 대충의 인수인계를 마친 시어머니는 이튿날 아침부터 식사 준비에 나오지 않았다. ‘설마, 조금 있으면 나오시겠지. 나오실 거야’ 불안한 마음을 안고 허둥지둥거리며 기다렸다. 초조하게 안방 문을 재차 힐끔거려도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때의 당황스러움이란.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솟아오른다. 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그때부터 느낌이 왔다. 시댁 가풍에 따른 나의 삶이. 외출에서 돌아오는 시어머님이 장을 봐 오셨기에 대문 밖을 나갈 일도 없었다. ‘뒷간과 친정은 멀수록 좋다.’는 말을 대놓고 하는 시아버지까지. 짓누르는 긴장과 함께 생각이라는 걸 할 순간도 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며느리의 삶. 나의 삶은 집 안에서만 존재했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지, 어른이 되면 자유를 찾아 훨훨 날아갈 거야.’ 

결혼 전 혼자만의 야무진 꿈이었다. 늘 마음속 깊숙이 품고 살았다. 엄격한 친정 부모님 아래 이런 생각으로 답답한 마음을 달래며 살았다. 사랑은 주셨지만, 자식을 온전히 믿지 못하셨던 부모님. 늘 불안해하셨고 하나라도 더 챙겨줘야 직성이 풀리셨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갇혀있던 나에겐 반항이란 있을 수 없었으니. 기껏 표현한다는 게 소심하게 툴툴거리는 정도랄까. 그러면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나중에 시집가면 신랑이랑 다 하고 살아. 신랑이랑 재밌게 살아”

한숨 쉬며 끄덕였었다. 30년 전 그 시절엔 어이없는 저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아니, 나에게만 그랬을지도. 부끄럽지만 그랬다. 아빠가 말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확실했다. 그러면 되나보다 했다. 순진하게도.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이 현실이 아닌데. 

    

출근 배웅을 하고 방에서 깜박 잠들었던 어느 날이었다, 잠결에 드는 싸한 느낌. 시계를 쳐다보니 아뿔싸 9시였다. 알람이 안 울린 건지, 못 들은 건지. ‘어떡해!’ 허둥지둥 튀어 나갔다.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 끝엔 시부모님의 안방이 있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통화 중인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맛있는 거 먹었네.” 

“그런 거 몸에 좋지.” 

“나는 아직 아침 안 먹었어.” 

귓가에 들리는 말들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였다.

“줘야 먹지.”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쳤다. 정신없이 반찬을 꺼내 상을 차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안방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식사하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아무 말 없이 밥상만 바라본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밥을 먹었다. 운동가는 시어머니를 배웅하고 청소기를 들었다. 한없이 가라앉은 마음을 끌어안은 채.

‘내일 아침부터는 자면 안 되겠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마음을 안고 어두운 집안을 묵묵히 치웠다.   

  

사실, 허둥대는 부엌에서 스치듯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반찬만 꺼내고 국만 뜨면 되는걸. 이럴 때 한 번쯤은 그냥 어머니가 드셔도 되는 것 아닌가? 이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부모님 잘 모시고 남편 내조 잘하는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해. 정신 차려. 누구나 처음은 힘들어. 익숙해지는 과정인 거야. 더 노력해야 해.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끝없이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익숙해지지 않는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가족들의 웃음소리 크기에 따라 행복은 부풀어 올랐다 쪼그려 들기를 반복했다. 나 자신이 나의 감시자가 되었다. 오늘 잘했나? 실수한 건 없었나? 늘, 위축되고 확인하며 불안해했었다. 힘든 삶을 내가 만들어 갔다. 며느리로 불리는 가사도우미를 스스로 만들어 갔다.     


심리학자 부부인 고건영, 김진영 교수의 책 <행복의 품격>에 절로 고개를 끄덕인 내용이 있다. 삶에는 커다란 사건보다 일상적인 골칫거리가 더 치명적이다. 삶이 파괴되는 건 고통의 총합이 아닌, 그 순간에 느끼는 무력감의 정도에 달려있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허무해져 갔다. 일과를 마친 저녁,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자꾸 생각이 떠올랐다. 결혼하고 신랑이랑 하고 싶은 걸 실컷 하며 살라고 말한 아빠의 말이. 내 방 벽지와 너무나도 다른 벽지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눈앞이 흐려졌다. 도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매일 밤 누우면 눈물이 흘렀다. 못한 일도, 꾸중을 들은 일도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냥 흘러내렸다. 남편은 생활이 바뀌어서 그럴 뿐이라며,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달랬다. 하지만 나는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는 걸. 아빠의 말은 헛소리라는 걸. 이게 내 삶이라는 걸. 밤마다 우는 시간은 석 달이 넘도록 이어졌다.  

    

철들기 전에 결혼해도 잘 사는 사람은 잘만 산다. 세상일엔 무엇이든 장단점은 존재하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답은 절대 없다. 다만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단점에 대한 것이다. 슬픈 가능성에 대한 것. 그것은 바로 조그마한 우물 속의 삶이 전부인 줄 알게 된다는 것. 바다 같은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한심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 수도 있다.

      

난 정말 다들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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