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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려니 Apr 24. 2024

4.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시집살이 이야기

남편은 결혼 전부터 아버님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나와는 한 살 차이인 26살이었으니 족히 2년 가까이 다녔으리라. 남편에게 물었다.        


“월급이 얼마야?”

“나도 잘 몰라. 많진 않아.”

      

무슨 대답이 이래. 남편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되묻지는 않았다. 괜찮았다. 많고 적음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다른 며느리들의 시집살이는 잘 모르겠으나, 이 집에서는 내가 돈 쓸 일은 없었다. 생활비와 공과금 모두 시부모님 주머니에서 해결이 되었으니까. 난, 월급으로 적금을 몇 개나 넣을 수 있을까. 뿌듯한 상상만 하면 되었다. 상상만으로도 든든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렸다. 손꼽아 기다리던 남편의 첫 월급날이었다.     

 

아버님과 같이 퇴근해 들어온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와 같았다. 

‘저녁밥을 먹고 주려나?’ 

1990년대 중반, 그때는 지금처럼 월급이 통장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봉투에 현금다발로 받아오던 시절이었다. 숫자로만 찍히는 월급이 아닌 손으로 만지는 맛이 있었다. 결혼 전 아빠의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아들던 엄마의 표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배시시 벌어지는 입술과 함께 번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켜보노라면 나도 덩달아 배부른 느낌이었다. 

     

‘그냥 주면 될걸. 왜 이리 뜸 들이는 거야.’ 

밥상을 차리면서도 눈으론 남편을 쫓았다. 남편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오늘이 월급날이라는 사실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 같았다. 분위기에 맞게 나도 별 날이 아닌 것처럼 밥을 겨우 먹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과일을 담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님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씀하셨다. 

“새아가, 이리 와서 앉아봐라.” 

남편과 나는 건네주는 방석 위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님 손엔 흰 봉투가 들려있었다. 인자하게 미소 띤 얼굴로 봉투를 건네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거 받아. 오십만 원이다. 모을 생각하지 말고 다 써. 네 한 달 용돈이라 생각하면 돼. S 월급은 아버지가 알아서 잘 모아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네는 이 아버지가 닦아 놓은 길 잘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알아들었지 새아가?”   

   

멍하니 앉아 대답 없는 나를 보며, 옆에 앉아있던 어머님도 한 말씀 거드셨다. 

    

“자식 못 되라고 하는 부모 없다. 다 자식 잘되라고 하는 거야.”    

  

스물다섯 인생에 들어본 가장 어이없는 말. 드라마에서나 나온다 생각했던 막장 대사가 지금 여기, 시댁 안방에서 내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TV는 분명 꺼져있었는데. 


아무리 뭐 모르는 어리숙한 그때의 나였지만 알 수 있었다. 이건 아니지. 월급이 얼마인지도 몰라. 아니, 그건 그렇다 쳐. 그런데 왜 우리 월급을 아버님이 가져가시는 거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는 남편을 쳐다봤다. 눈을 내려 깐 채 가만히 바닥 장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뭐라도 아무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믿고 기댈 사람은 남편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 시부모님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계셨다. 시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며느리로 대답을 해야 했다. 

“네, 아버님” 

그 자리에선 그래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는 가족이었다. “아니요”라는 뒷말이 붙는 순간 “어허!” 아버님의 윽박지름이 따라왔다. 시집을 와서 한 달 동안 지켜본 아버님의 모든 말은 의견을 가장한 통보였다. 통보에 반하면 말대꾸가 되었고, 호래자식이 되는 거였다. 그 누구도 길게 답하지 않았다. “네”한 마디면 끝. 미련 없이 뒤돌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적막만이 흐르는 집. 지금도 궁금하다. 아버님은 진심으로 그런 상황들에 만족하신 걸까.  

   

엄격한 부모님 밑에 자란 건 남편과 나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엄격함의 결이 달랐다. 그것은 남편과 나의 반응에서도 차이가 났다.


친정 아빠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었다. 아르바이트하려 할 때 용돈을 쥐여주는 식이라면 설명이 될까. “이거 받고 아르바이트는 하지 마.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아?” 세상엔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아빠의 그늘 밑을 벗어나는 행동은 악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훈육이었다. 훈육 속에 녹아있는 아빠의 사랑을 느끼려 애쓰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진 나와 당신의 걱정에 갇혀 자식을 믿지 못하는 아빠. 환상의 콜라보였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남편은 나와 달랐다. 언제나 화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가진 감정이 답답함이었다면 남편의 그것은 분명 화였다. 소심하나마 불만을 표현하던 나와는 달리 짜증도 내지 않았다. 아버님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웃음조차 짓지 않는 그것이 화의 표현인 것처럼. 아버님 앞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제야 화를 드러냈다.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말해 봐야 아무 소용없어.”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포기 상태였다. 아버님의 사랑은 권력이었다.  

   

집 살 걱정 안 해도 되고, 생활비 걱정 안 해도 되는 현실이었다. 거기에 더해 돈 모을 걱정까지 없어졌다. 용돈 오십만 원으로 과자나 사 먹으면 되는 거였다. 난 걱정거리가 없는 며느리였다. 행복한 사람임이 마땅해야 했다. 

‘여기서 불만이라고 징징거린다면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 배부른 소리 작작해라며 쓴소리나 듣겠지. 이만한 복이 아무나 있는 거냐며 손가락질받겠지. 그렇겠지.’

2층 우리 방으로 어떻게 올라갔는지 기억에 없다.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들여진 흰 봉투를 내려다본 기억밖에. 펼쳐보고 싶지도 않았다. 눈물만 흘러내렸다.  

    

‘도대체 난 뭔가.’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두 생각만이 손바닥 뒤집듯 밤새 오갔다. 말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남편의 말만이 가슴에 박힌 날이었다. 명치 끝이 꽉 막힌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꾸역꾸역 내쉬었다. 그렇게 까맣고 무거운 밤을 보냈었다. 어른들 말씀 잘 들어야 해.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해. 빌어먹을 생각은 놓을 줄 몰랐다. 밤새 눈물 흘리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억지다짐을 했었다.   

   

엄격한 부모님 아래 살아가는 자식의 삶이란. 그 숨 막힘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그렇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얘기한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나 또한 마찬가지. 젤 앞줄에서 외쳐 댔었다. 따끈한 주민등록증을 손에 쥐었을 때는 이젠 됐다 싶었다. 지갑 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걸 구경만 하기 전까지는. 


신중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이었다. 그런 삶을 꿈꿨다. 걱정 많은 친정 부모님께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었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남편의 첫 월급날 시아버님의 첫 용돈을 받기 전까지는.  

    

난 느끼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숨 막히는 불안에 눈물 흘렸다. 하지만 스스로 설득했다. ‘어쩔 수 없잖아’ 눈을 감았다.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다. 아버님이 닦아주는 매끈한 길을 뒤따라 걸을 결심을 했다. 내 앞에 놓인 울퉁불퉁 자갈길을 못 본 척 고개 돌렸다. 착한 며느리라는 호칭에 위안 삼으며. 난 내 선택의 책임을 지고 살아야 했다.  

   

지금이야 안다. 어차피 흘리게 될 눈물, 아버님의 길이 아닌 나를 위한 길에서 흘렸어야 했음을. ‘도대체 난 뭔가.’ 이 생각을 놓지 않았어야 했음을. 당연한 이 사실이 그때의 나에겐 어쩌면 그리도 힘들었는지. 안쓰러웠던 나를 돌아본다. 어른이 되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던 나. 그때의 내가 가르쳐 준다. 

문득,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생각을 흘러버리면 안 된다. 깊은 내면의 속삭임이 들리고 있는 거니까. 외면하지 말고 귀 기울여 들어줘야 한다. 선택은 그다음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칼 융은 말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권력이 없고, 권력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과 권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사실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면서 자식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부모들은 아직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침대에 앉아 하염없이 봉투만 바라보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마음을 어찌 잊을까. 

다 큰 성인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된 지금, 생각한다. 난 지금 자식을 위하는 말을 하는 걸까. 걱정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한 채 내 욕심을 채우고 있진 않은가. 권력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지 않는가를. 

나와는 다른,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자식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 

이것 또한 내 욕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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