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러려니 Jul 18. 2024

8. 아버님의 꿈

시집살이 이야기

시아버님은 꿈이 있었다. 

한 지붕 아래서 아들 세 명과 함께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꿈. 삼대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사는 꿈. ‘복닥거린다’ 말하지만, ‘거느린다’로 들리는 그런 말씀을 항상 하셨다.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하고야 마는 분이셨다. 남편과 나의 결혼을 밀어붙이던 순간, 이미 그때부터 꿈을 향한 계획은 실행되고 있었다.  

   

나의 임신은 아버님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꼬물꼬물 손자까지 더해졌으니, 꿈을 이룰 일만 남은 거였다. 본격적으로 기존 집보다 좀 더 넓은 집터를 알아보셨다. 당신이 꿈꾸던 집. 이 층엔 당신들이 사는 한 가구, 일 층엔 세 아들이 사는 세 가구가 있는 그런 집. 일찌감치 아버님의 머릿속에 그려놓고 계셨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설계부터 타일 하나까지 아버님 손을 거쳐야만 했다. 출산 준비와 산후 조리로 친정에 가 있던 두 달여 동안 공사는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만들어 내셨다. 몸조리가 끝난 나는 아버님이 완성해 놓은, 아버님의 꿈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집터가 정해졌을 때 부른 배를 안고 아버님을 따라가서 본적이 있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따뜻한 베이지색 단층집. 집을 둘러싼 넓은 잔디 마당이 인상 깊었다. 출산 후 따라가서 본, 그때 그 집은 차가운 회색 대리석 이층집으로 변신해 있었다. 마당 있던 자리까지 덮어 선 커다란 이층집. 우리에게 배당된 곳은 일 층 세 가구 중 제일 오른쪽 공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분가 아닌 분가였다. 잠만 자는 우리 집이 생겼을 뿐이었지만, 새벽부터 이 층을 오르내려야 하는 생활이었지만, 괜찮았다. 그래도 좋았다. 아버님에 의한 어설픈 설계에 실용적이지 못한 공간이었지만 우리 집이 생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배시시 미소가 흘러나왔고, 설레었다.    

 

아기 몸엔 모유가 좋다는 말에 돌까지 모유를 먹였고, 천 기저귀가 좋다는 말에 일회용 기저귀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워킹맘도 아니었고, 갇혀있다시피 집에만 있는 나에겐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신이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순간들이 행복했다. 시부모님 의견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며느리의 일이 아니라, 아기로 인해 보장되는 온전한 엄마의 일은 피곤함도 웃으며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내가 미처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손주를 생각하는 시부모님의 마음이었다.


나만큼이나 아기를 예뻐하는 이는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이셨다. 원체 누구보다 아기를 좋아하는 친정 아빠는 출근길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자주 우리 집으로 들렀다. 태양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와 아기를 안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가셨다. 비록 1층이었지만, 분가는 역시 분가였다. 나만의 공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치 볼 것 없었다. 편안했다. 소소한 웃음이 흘러 다녔다. 

아버님 또한 이른 퇴근길이면 아기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셨다. 곁에 계신 시부모님 덕에 아기를 봐주실 때 다른 일을 할 수 있어 편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20분이 되고. 저녁 먹고 설거지하면 우리 집으로 돌아오던 순간들이 아기로 인해 시부모님과 머무르는 순간들로 늘어났다. “우리가 데리고 같이 잘 테니 넌 내려가서 편하게 자거라.” 이젠 아기와의 시간도 내 생각대로 계획할 수 없는 순간들로 늘어났다. 

아버님의 마리오네트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새아가. 돌잔치를 크게 벌일 건 없잖니. 그냥 집에서 간단히 식사 대접을 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괜찮겠지?”   

  

모든 계획은 아버님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손님 치를 걱정에 역정을 내는 시어머님 의견조차도 “쓸데없는 소리!”라며 가벼이 무시되었다. 남편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뷔페에서 하고 싶다는 ‘건방진 말’은 할 수 없었다.    

 

집에서 하는 돌잔치는 이사 온 지 1년이 흘렀지만, 집들이를 겸해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버님 첫 손주의 돌잔치에 양가 친척과 지인들이 셀 수 없이 들이닥쳤다. 시어머님의 고집으로 다행히 출장뷔페 음식이 곁들어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돌잔치가 수월히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도떼기시장, 딱 그것이었다. 나와 어머님 말고, 어떤 이가 부엌에서 같이 도왔는지도 기억이 흐릿하다. 분명 누군가 돌아가며 거들어줬던 것 같다. 그게 아니고야 어머님과 나, 둘이서 치를 수 있는 손님들이 아니었으니까.  

    

친정 부모님 옆에 앉을 시간도 없었고, 결혼 후 오랜만에 만나는 친정 친척들하고도 겨우 눈인사 한 번 맞추는 것이 전부였다. 그럴 것 같아서 친구들에겐 연락도 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설거지하고 있자니 “새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앞치마에 젖은 손을 비비며 부엌을 나가보니 돌잡이가 한창이었다. 나는 준비한 적도 없는 돌잡이 용품이 쟁반에 가지런히 줄서 있었다.   

  

“그래도 엄마가 같이 있어야지. 나오라 해.”  

    

누군가 얘기하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덕분에 한쪽 언저리에서 아기의 돌잡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한복은 고사하고 단정히 차려입은 정장도 아닌, 면티와 청바지를 입은 채 질끈 묶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당기며 돌 사진 한 장을 같이 찍었다. 내 자식의 첫 생일날, 말랑한 자식 아이의 손을 처음 잡아 보았다.  

    

하루가 어찌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쏙 빠졌던 자식의 돌잔치 날. 축하한다는 말과 고생 많았다는 인사말이 중구난방으로 휘몰아쳤다. 혼이 나간 정신을 붙잡으며 접대 미소를 머금은 채 허리를 숙여댔다. 설거지와 기계적인 인사를 반사적으로 반복했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눈치 보며 안도감 같은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올바른 대접을 치러냈다는 만족보다 어려운 숙제를 치러냈다는 안도. 찝찝했다. 속이 후련하지는 않았다.     


‘이게 맞는 건가. 원래 이런 건가.’ 

    

새하얀 옷에 꿀 한 방울이 툭 떨어지듯, 생각이 스며들었다. 끈적이게 달라붙은 기억은 그날 한 미소에서 시작됐다. 돌잔치를 치르고 돌아가는 손님들의 두 손엔 사과 한 상자가 쥐어졌다. 현관 밖 마당 한쪽엔 산더미 마냥 사과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아버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문을 나서는 손님들.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 치는 아버님. 그리고 흡족해하는 아버님의 미소. 그날 유일하게 선명히 기억나는 그 미소.  

    

그 순간, 세상이 고요해지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느꼈다. 찰나였지만 오래도록 바라본 기분. 간단한 대접과 사과 더미의 괴리감. 그리고 아버님의 미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쌓일 만큼의 사과를 준비하며, 아버님은 과연 간단한 식사 대접이라 생각했을까. 손 귀한 집에서 십여 년 만에 어렵게 태어난 첫 손주도 아닌데. 그 정도의 애태움이 있었다면 이해가 수월했을까.


내 눈엔 보였다. 아버님이 자랑스럽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완벽한 가족의 모습. 손자까지 삼대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사는 모습. 타인에게 보이는 완벽한 가족의 모습. 그것이 아버님에겐 만족스러운 행복이었고 꿈이었다. 아버님의 미소에 쓰여있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 이런 게 행복이잖아.  

   

그때부터였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난 뭐지, 라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기 시작한 것이. 장담하건대 아버님만 행복한 돌잔치였다. 적어도 난 행복하지 않았다. 나도 아이와 눈을 맞추며 웃고 싶었다. 나도 축하해주는 이들과 눈 맞추며 얘기하고 싶었다. 축하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주고받고 싶었다. 마음 깊이 누르고 있던 나의 꿈. 내가 원하는 돌잔치는 그런 것이었다. 

     

“새아가”  

    

아버님이 부를 때면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이번엔 뭘 해야 할까. 얼마만큼 해야 할까. 분명한 건. 뭐든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 이해되지 않고, 하기 싫은 내 마음은 당연히 꾹 눌러야 한다는 것.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말, 바로 그것이었다. 그럴수록 착한 며느리라는 칭찬은 따라다녔다.  

    

아버님의 꿈 뒤에 늘 서 있어야 했다. 눈물만큼이나 공허함이 커져만 갔다.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구태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착한 며느리 자리를 내쳐버릴 용기가 없었으니까. 칭찬을 들으며 안도하던 나. 힘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라 착각하던 나. 그것만이 기억날 뿐. 그저 흐르는 눈물을 닦고. 깊은 한숨을 내뱉고. 아침이면 눈을 떴다. 아버님의 꿈. 그곳은 겁 많은 새아가의 절망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7. 출산과 함께하는 한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