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살이 이야기
꼬물거리는 태동만으로도 위로를 주던 아이가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어른이 되어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던 시간도 돌아보면 장마철 계곡물에 지지 않는다. 얼마 전,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기 된 원룸을 옮긴다며. 직장 때문에 멀리 타지 생활을 하는 녀석인지라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것도 마음을 먹어야 한다. 이사 때도 거들지 못하고 조심하라는 말만 했더랬다. ‘그래도 이사 한 방을 한번 보고는 와야지’ 애가 쓰였다. 아흔 살의 노모가 예순 살의 자식을 가리키며 아기라고 한다더니. 난들 다를 게 없다. 달력을 보며 날짜를 꼽고 전화기를 눌렀다.
“이번 주말에 다른 일 있어? 엄마 가볼까 하는데.”
“와도 돼. 그런데 A도 올 거야. 괜찮지? 같이 있어도 상관없잖아.”
“그래? 어쩌지? 그래도 엄마는 혼자가 편하지. A도 아마 그럴 거야.”
“그럼 A랑 얘기 한번 해 보고 다시 연락할게.”
A는 아들의 여자친구이다. 예전부터 인사도 주고받아 마냥 어려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아들과 둘만 있는 것보다 불편한 게 사실 아닌가.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과 두 다리 쭉 뻗고, 아무 말이나 편하게 주고받다 오고 싶었다. 결국, 의견이 오고 가며 내가 시일을 미루는 거로 날짜를 다시 맞췄다. 이쯤 되니 꼰대 기질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자주 만나는 A는 다음 주에 봐도 되지. 모처럼 한번 들리는 엄만데, 저 녀석도 참’
아들에게는 엄마가 1순위가 아니었다. 나도 안다. 당연한 흐름인 것을. 알면서도 삐져나오는 섭섭함은 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들 나이 때의 나였다면. 그랬다면 A의 방문을 미뤘겠지. 난 항상 부모에게 맞춰주는 착한 자식이었으니까. 고민이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고. 그러나 아들은 달랐다. 엄마와 A의 중간에 서서 결과를 찾았다. 서로에게 좀 더 나은 결과를.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호기심에 가까운 관찰처럼. 보고 있자니 뭐랄까, 설명할 수 없는 바람이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마음속을 간질거렸다. 섭섭함은 어느새 바람결에 실려 갔다. 자연스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보였다. 아들이 태어나던 그 날이. 이해하지 못하고 묻어 둔 채 흘러온 그 날의 감정이. ‘이제 내가 보여요?’ 살랑거리며 손 흔들었다.
처음으로 남편이 산부인과에 발을 들인 날, 그날이 아들이 태어나던 출산일이었다. 분만 대기실 앞에 있는 남편을 보았다. 이상했다. 좋다든지, 든든하다든지 어떤 느낌이 들어야 정상 일진데. 아니었다. 신기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원래 이런 건가?’ 혼란스러워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나도 모를 내 감정을 품은 채, 진통은 시작되었다.
난산이었다. 꼬박 48시간, 일수로는 사흘이 걸렸다. 가족이 분만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는 시절도 아니었다. 진통을 견디며 누워있는 사흘 동안, 대기실의 다른 산모들은 꾸준히 바뀌었다. 순산만큼 부러운 게 없었다. 나는 왜 이럴까. 다른 산모들은 저렇게 잘 낳는데 나는 왜 이럴까. 무서웠다. 나만 다르다는 느낌은 깊은 두려움에 서러움까지 켜켜이 쌓여가게 했다. 두 번째 밤에는 밥까지 나왔다. 힘이 없으면 아기를 낳지 못한다나. 세상에. 고통을 참으며 억지 밥을 먹었고, 빌어먹을 관장도 다시 했다.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부여잡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간호사를 불러댔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조금만 주물러 주실 수 있나요?”
처음 보는 이에게 뻔뻔한 부탁도 해댔다. 산통은 염치 따위는 하찮게 쓰레기통으로 처박게 하는 것이었다.
어두운 분만 대기실에 누운 아득한 정신 위로 빗소리가 떠다녔다. 창가에 쳐진 하얀 커튼이 흑백사진으로 기억에 박혀있다. 보이지 않는 창밖을 상상했다. ‘내일이면 저 밖을 나갈 수 있을까.’‘이렇게나 끊어질 듯 아픈 허리로 다시 걸을 수는 있을까.’ 머릿속을 헤집는 온갖 두려움을 안고 몸을 떨었다. 그때, 검진을 온 의사가 말했다.
“엄마도 힘들지만, 아기도 지금 같이 힘들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촤아아악. 얼음장 같은 찬물이 싸대기를 올려 치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라고.
‘아.. 그렇구나.. 그렇겠구나.’
내 고통에 아기 생각은 뒷전이었다. 나만큼 아기도 견디고 있다고 했다. 혼자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기가 더 힘들까, 고함조차 이 악물고 내뱉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하지 않던 기도를 밤새 했었다. 더 지체할 수 없는 시간에 제왕절개를 준비하던 찰나, 분만에 가깝게 아기가 내려왔다 했다. 드디어. 분만실이 분주해졌다. 진통 주기에 맞춰 힘을 쥐어짜는 나와 옆에 올라타 윗배를 밀어 대 주던 간호사. 우리는 함께 아기를 낳은 거나 진배없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말도 안 되는 고통이 찰나의 순간, 사라졌다.
“낳았어요. 끝났어요. 고생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의사와 간호사의 윙윙거리는 말소리 사이로 “으애애앵” 울음소리가 삐져나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거꾸로 들린 아기가 보였다. 빨리 못 나오고 답답하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잘 우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아픔은 어느새 다 잊혔다. 그리고 걱정이 무색하게도 내 발로 걸어서 병원 밖으로 무사히 나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몸조리를 위해 간 친정에서의 한 달은 호강에 겨웠다. 손 한번 까닥하지 않고 누워서 지냈으니. 엄마 아빠는 고생이었지만, 난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미역국을 한 대접 가져온 엄마는 분만 대기실 앞에서의 상황을 신나게 말해 주었다.
“이제나 나올까 저제나 나올까.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교대 나오던 간호사가 우리한테 오는 거라. 산모가 힘들 텐데도 고함 한번 안 지르고 잘 버티고 있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잘하실 거라고 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꿈만 같던 시간 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두 눈을 반짝이며 미역을 오물거렸다.
“아기 나오고, 전부 다 기분 좋아서 난리였지. S 서방도 기분이 좋은가 간호사들 수고했다고 이십 만원을 챙겨 주더라. 맛있는 거 사다 같이 드시라고.”
멈칫. 또 그 기분이었다. 분만 대기실 앞에서의 알 수 없는 감정.
“그래, 간호사님 정말 고마웠어. 잘했네.”
미역국을 마저 먹었다. 나도 모르게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배는 불렀지만, 마음만은 공허했다. 텅 빈 마음엔 찬바람만이 스산하게 오고 갔다. 혼자만의 감정을 삼키는 것쯤은 익숙했다. 밤낮이 바뀐 아이에 신경 쓰는 초보 엄마 자리도 만만치 않았다. 정신없었다. 그렇게 희미해져 갔다.
삼켰을 뿐, 잊히지 않은 감정이 아들 녀석을 보고 있자니 바람이 되어 살랑거린다. 시리다 못해 얼음장 같던 공허함. 공허함으로 이해했던 감정이 이제야 보인다. 후 순위의 서러움. 쓸쓸함이었음을.
상대방을 위해주는 것에 익숙했기에 누군가가 챙겨 주기를 기대해 본 적 없었다. 무엇이든 스스로가 알아서 해야 한다며 다짐하던 나였다.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기에 불만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 임산부들을 요리조리 신기하게 지켜볼 때가 있다. 결혼 생활을 통틀어 귀한 대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시기 아닌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그녀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그 시절 나로 돌아간다. 내가 몰랐던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들. 부러누면서도 궁금하다. 그 세상의 행복은 어떤 맛일까. 상상하곤 한다.
난 임신은 나만 하는 게 아니라는 속 좋은 생각을 했었다. 다들 하는 거라고. 그러니 유난 떨 것 없다. 그랬었다. 무엇보다 임신은 내 것이 없는 나의 하루에 나만의 순간을 만들어 주는 고맙고도 귀한 것이었으니.
누군가는 “뭐가 그렇게 고맙고 귀하다는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를 그때지만,
나에게는 “그래도 좋았어.”라는 몽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먹고 싶은 것도 알아서 찾아 먹었고, 산부인과도 남편과 같이 간 적이 없었음에도.
무뚝뚝한 남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이 있을 때 고개 끄덕이며 듣는 쪽은 나였으니까. 남편을 믿었다. 가부장적인 부모님 때문에 섣불리 다가오지 못할 뿐, 마음은 늘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남편과 나. 우리 둘 다 같은 처지라 생각했으니까. 시부모님이 보고 계시니까. 그도 나를 위한 마음은 넘쳐나지만 어쩔 수 없을 거라 이해했었다. 믿음 뒤에 오는 공허함을 끌어안고서. 그런가 보다 했었다.
“이번 병원 검진은 같이 가. 아기 초음파 나도 같이 보고 싶어”
“혼자서 힘들었지. 같이 해 주지 못해 미안해”
남편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말이었다. 기다렸다. 어깨 툭툭 치며 “고생했어” 이런 말 말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을 고파했다. 며느리가 아닌 아내로 대해주길 소원한 거였다. 서로의 존재보다 부모님이 1순위였던 그와 나. 그 속에서 나의 존재는 철저히 후 순위였다. 늘 마음이 쓰라렸다. 쓰라림을 공허함으로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려 노력하는 나였다. 며느리로서의 존재가 아닌 나라는 존재 가치를 고파했으면서.
분만 대기실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남편을 보는 순간. 나보다 간호사들에게 행복을 표현하는 남편을 느낀 순간. 붙들고 견디던 남편에 대한 믿음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라면 나부터 먼저 포근히 안아줄 텐데' 그리곤 생각을 삼켰다. 기댈 수 있는 곳은 남편뿐이라 생각하면서도 표현하지 않았다. 나마저도 나 자신을 후 순위로 미루고 있는 거였다.
아들은 엄마가 온다고 해서 무작정 여자친구에게 약속을 미룰 것을 권하지 않았다. 미루지 못할 이유가 있진 않은지 살펴보았다. 엄마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나 또한 미루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알맞은 선택을 찾았다. 서로를 존중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따뜻한 바람이 일었다. 바람 속에 위로가 살랑거렸다. 신기했다. 대리 만족이란 게 이런 건가. 재미난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잘하고 있어. 나보다 낫구나.”
엄마가 1순위가 아닌 것에 대한 섭섭함. 그쯤이야 나비 날개처럼 가벼이 훨훨 날려 버릴 수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과 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섭섭함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안다. 서로를 당연한 존재로 쉬 여기지 않는 것. 존중한다. 표현한다. 그 속에서 만족을 찾는다.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그러다 보면 하루하루가 따뜻해질 것이다. 그거면 된다. 그 안에 행복이 산다. 누구보다 나는 그것을 잘 알지 않는가. 행복은 찾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 했다. 아들 녀석을 보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