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길 출발 1년을 맞아

1년차, 서울

by 걷는수달

어느새 1년이 되었다.

작년 오늘,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프랑스의 낯선 시골 생장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 발을 내딛었다.


돌이켜 보면 그땐 몇년 동안의 피로와 열기가 잔뜩 정수리에 쌓여있었다. 머리를 식힌다든지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잠시 일상과 가족과 보살펴야 하는 것들을 외면하고 어디론가 떠나는 (또는 도망갈?)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일을 잠시 쉬면서 이런 저런 여행 준비를 하고, 마일리지도 모처럼 시원하게 한번 써보고, 참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가 소중했던 순례길의 나날을 보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잊을 수 없는 감흥에 젖었던 순간을 보냈던 그 길의 시작이 벌써 1년이라니. 참 시간은 빠르다.


오늘 카미노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과 단톡방서 우리 출발한지 1년됐어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도 Time flies라고 시간은 날아간다고 하는걸 보니 시간이 빠른 감각은 글로벌하게 비슷한가보다.


얼마전에 다시 만난 카미노 인연 부산 이선생님은 여전히 카미노블루에 빠져계시다고, 이번엔 포르투갈길을 꼭 걷고 싶다고 하셨다. 산티아고 길을 걸은 후 겪는 일종의 길에 대한 향수병을 카미노블루라고 한다던데 나도 올해 5월인가 6월쯤, 그러니까 다녀온 뒤 6개월 되었던 시점에 무척 생각나며 카미노가 그리웠던 것 같다.


이제 출발 기준으로는 꼭 1년, 도착 기준으로는 11개월 쯤 되었다. 6개월차 만큼 그리운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떠올려보면 매일매일이 생생한게 그 먼 곳의 낯선 길을 36일간 꼬박 걷고 왔다는 게 신통하고 요상하다. 카미노 한번 걸었다고 인생이 바뀌고 엄청난 깨달음을 얻거나 하는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의 단단한 조약돌 하나는 심었달까. 삶의 잊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남았음은 분명하다.


뭐 벌써 일상으로 돌아온지는 꽤 되었고 카미노에서의 감흥은 상당히 빛이 바랬고 생활의 피로와 매너리즘에는 하루하루 아주 성실히 빠져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왕왕 생각나는 카미노에서의 어떤 순간들은 여전히 신선하고 팔딱거려 (활어회?) 아 내가 그때 저런 순간을 살았었구나 하는 새삼스런 충격과 반짝임을 여전히 전해주고 있으니, 참 잘 다녀왔다 싶다.


출발 1년을 맞아 그때 걸으면서 매일매일 블로그에 올렸던 카미노 여행일기들을 한번 다시 꺼내어 브런치에 정리해보려고 한다. 뭐 오랜만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종종 다시 읽으며 꽤나 되새김질한, 여전히 친숙하고도 생생한 기억들이다. 게다가 나름 열심히 썼는지 걸은 날짜 수보다 일기 수가 더 많다... 딱 1년의 차이를 두고 마치 현재 진행형인것처럼 하루하루 다시 써보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과연 내가 그렇게 부지런할수 있을까?


여튼, 1년만에 다시 부엔 카미노!


2023년 9월 18일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