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전날, 생장
한국에서 약 14시간을 거쳐 파리로,
파리에서 1박 후 환승 포함 6시간 여 기차를 타고 어제 여기 생장으로 왔다.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길은 언젠가 한번쯤 와보고 싶은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고, 마침 직장을 옮기며 3개월 정도 쉬려던 참에 좋은 타이밍이다 싶어 훌쩍 지르긴 했는데, 오는 여정 내내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과 근심이 멈추질 않았다.
이나이에 지금 쉬는게 맞는건가부터 시작하여, 철없이 여기 덜컥 올 형편이기는 한가 돌아가서 일은 다시 잘 구해질까 지난 6월말에 살짝 무리한 등산 뒤 오른쪽발의 통증이 약간 남아있는데 그건 괜찮을까 주말에 부모님 챙겨드리는건 어쩌지 등... 인천에서 파리를 거쳐 다시 프랑스 남부 생장까지 긴 길을 이동하며 안그래도 피로하고 약간은 현기증 비슷한것도 있을락 말락 한 와중에 싱숭생숭한 마음만 가득이었다.
그래도 어제 기차 환승하러 바이욘역에서 잠깐 내렸을때, 역앞에서 푸근하기 그지없는 날씨를 느끼며 우연히 보게된 건물에 세상 성의없이 써져있는 "땐스 앤 요가" 간판을 볼땐 왠지 모를 위안감이 들면서 살짝 긴장이 풀리기는 하더라.
그러고보니 어제는 파리서 낮 12시 기차를 타야 했는데, 탑승 플랫폼을 확인하러 아침 여서 일곱시쯤 일찌감치 일어나 아직도 어둑어둑한 파리 몽파르나스역에 무려 사전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워낙 낙천적으로 여행하는 스타일이라 여간해서는 그렇게까지는 안하는데 이번 여정은 무언가 계속 긴장의 끈이 팽팽했나보다.
저녁 무렵 여기 생장에 도착하여 밤에는 관광오신 유럽 어르신만 가득한 도미토리 숙소에서 혹시 누가 핸드폰이라도 훔쳐가지는 않을까하는 아무 쓰잘데기 없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며 침낭속에 폰을 품고 잤다. 엄청난 코골이 소리의 보유자분이 한분 계셔서 그나마도 선잠이었다.
또하나의 불안요소였던 내일 머물러야 하는 오리손 산장 숙소는 예약답변 메일이 안와서 며칠간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는데 아침 일찍 전화하니 의외로 쿨하게 해결이 되었다. 오리손 산장 주인장이 전화에는 매우 친절한데 메일은 잘 확인을 안하나보다. 영업을 하는지 안하는지 어둑어둑한 코인 빨래방에서 밀린 빨래를 처리하고 순례자 사무소에 순례자 여권 받고 나니 오전 10시쯤. 이제 비로소 해야할 업무들을 얼추 마친 것처럼 아주 조금은 안심이되는 상태가 되었다. 긴 여행의 시작은 의외로 참 번거롭고 조금은 탈진된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그것 마저 내가 이걸 해야하나 하는 불확신 속에서 시작하는 기분이다.
아직 시차적응은 안된거 같고 오늘의 생장은 세상 맑고 동화속 마을처럼 예뻐서 매우 현실감은 떨어지는데 그 와중에 점심에 찾아간 식당에서 뜨끈한 수프를 주문해 찾아마시니 속도 없이 또 쪼금 행복해졌다. 참 못나게 여행하고 있는 위태로운 출발전야다.
이런 위태위태한 마음과 달리 찍으면 화보같이 잘나오는 사진의 괴리감도 참 오묘하며 그와중에 또 생장 구석구석을 물리적으로는 잘 보고 잘먹고 다니는 나도 참 이상한 놈이다.
내일 아침에 이제 길을 출발하는데 이런 상태로 과연 괜찮을까?
2022년 9월 17일 토요일 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