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의 첫걸음을 떼었다

1일차, 생장에서 오리손 산장

by 걷는수달

드디어 걷는 길의 첫날, 생장 숙소에서 7시에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내가 걷는 프랑스길의 첫 길은 경치도 멋지지만 시작과 동시에 가장 힘든 코스로도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프랑스 남부 순례길을 시작하는 작은 도시 생장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 중간에서 국경을 지나고, 스페인 론세스바예스까지 약 24킬로 정도의 산길을 주파한다.


평지는 몰라도 여정의 처음부터 그 정도는 좀 무리지 않을까 싶은 사람들은 중간에 한번 쉬어서 이틀에 걸쳐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약 1/3 지점에 오리손 산장과 보르다 산장이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고, 나는 오리손 산장에 예약을 해놨다. 알고 보니 보르다 산장은 거의 서너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오리손도 미리 이메일로 예약은 못했는데 다행히 어제 오전에 전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단축된 오늘의 코스는 대략 8키로의 오르막길. 넉넉잡아 서너 시간의 나름 널럴한(?) 여정이다. 생장이 해발 백 몇미터, 오리손 산장이 칠백 몇미터니까 약 600미터를 올라가는 코슨데, 청계산을 10키로 배낭 매고 약 3시간에 걸쳐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배낭 무게가 만만치 않지만 천천히 오른다고 생각하면 무난하지.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시작한 첫걸음. 쌀쌀한 새벽녘에 출발을 했는데 걷다보니 천천히 동이 트고 빠르게 날씨도 풀려갔다. 다소 춥긴 해도 서울의 매서움보다는 온순하다. 오르막도 비슷한 느낌으로 순한맛이다. 가파르게 치고나간다기 보다 완만하게 꾸준히 천천히 계속 올라가는 길이었다. 사실 본격적인 오르막은 중반 이후에 나왔던것 같은데, 그때쯤 되면 피레네 산맥의 봉우리며 능선이 아주 멋지게 펼쳐진다.

중간 중간 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무언가 설레고 예쁜 시작의 기분이 난다.



길은 대부분 포장도로였고, 후반부에 와서야 산길이었다. 사실 산길이 나오자 마음속으로 꽤나 안도한것이, 출발하기전에 트레일 러닝화를 살까 등산화에 가까운 신발을 살까 고민하다가 등산화쪽으로 골랐는데 막상 오늘 처음 걸어보니 포장도로만 계속되어 내심 초초 또는 억울해하기 일보직전인 찰나였다.

등산화쪽이 쫌더 무겁고 바닥이 탄탄하고 흙길이나 험한 길에 좋고, 트레일쪽은 가볍고 말랑하고 포장길에 좋다. 이렇게 포장도로만 계속되다가는 신발 최적화를 못한 아쉬움과 집착이 끊이지 않을뻔했는데 흙길이 나와준 덕분에 있을뻔 했던 후회와 갈등이 샥 사라졌다. 고마워요 흙길.



예정보다 조금은 빠르게 10시 반쯤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오리손 산장은 알베르게로도 쓰이지만 지나가는 순례객들이 쉬어도가고 주변 주민들도 자주 놀러오는 곳인듯 하다. 사람들로 굉장히 붐볐다. 산맥 전망 뷰의 테라스 공간이 특히 멋져서 이름난 곳일 듯 한데 예전에 갔던 호도협의 객잔 이후로 최고의 식당뷰였던것 같다. 날씨마저 완벽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아직 체크인도 할 수 없어 뷰맛집 테라스에서 커피한잔 하면서 경치도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드디어 체크인이 가능한 시간이 되어 체크인을 한 뒤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뭐 그냥 싱겁고 무난한 브런치 세트랄까? 이어서 숙소를 배정받고, 빨래를 하고, 배낭속의 짐을 기존 종류별 분류에서 자주쓰는것만 따로 빼서 한 파우치에 넣는 식으로 재정리를 하는 등 여러가지 정비를 했다.

순례자는 고단하구나. 그래도 이렇게 조근조근 부지런하게 일과를 하니 뭔가 살뜻한 뿌듯함도 있다. 엣헴.



노곤노곤해서 낮잠을 살짝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저녁시간. 저녁식사는 산장 예약에 내일 아침식사와 더불어 포함되어있는데 야채수프, 닭고기와 채소, 커스터드크림이 들어있는 것 같은 파이랑 와인이 같이 나왔다. 처음보는 낯선 사람들과 마주앉아서 식사를 한다. 테이블마다 적당히 덜어 먹으라고 큰 그릇에 뭉텅뭉텅 나누어준다. 아무래도 낯을 가리는지 다들 치킨을 한조각씩만 받고 더 안먹는 것 같지만 나는 한덩이 더 먹고 싶다. 적당한 타이밍에 염치 불문 한덩이를 더 덜어서 먹었다. (다들 안 덜어먹고 있었고 마지막 조각도 아니었단 말이지) 산티아고 길의 음식은 별로라고 소문 들었던거와는 달리 첫날은 계속 잘먹고 있다.



오리손 산장은 전통이 있다는데, 그건 저녁을 먹으면서 모두의 앞에서 한사람씩 자기 소개와 함께 카미노를 걷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운동도 하고 사람도 만나러 왔다는 분, 버킷리스트였다는 분, 바로 그 이유를 찾으러 왔다는 분 (오 재치있다) 등등 여러 국적의 사람들의 각자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었다. 나는 참 재미없고 맹숭하게도 직장을 옮기면서 시간이 나서 왔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진짜 이유는 뭘까? 시간이 난건 올 수 있는 환경이었지 온 이유는 아니었을텐데.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엔 아직 너무 첫날인가. 걸으면서 쫌더 생각해봐야겠다. 생각할 시간은 많겠지.


아참, 이 행사를 매일 매일 수도없이 노련하게 진행했을 오리손 산장의 주인아저씨는 말투가 쿨한게 약간 아이언맨의 로다주 삘이 난다.



의심해서 미안하단 말을 신발에게 전하며 오늘의 일기 끝.


9월 18일 일요일 산티아고 카미노 첫 날

오늘 걸은 거리 약 8키로, 남은 거리 약 780키로

프랑스 오리손 산장 Refuge Oris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