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 여행: 산속 노란 집
80일의 여행 중 20여 일을 이탈리아 남부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던 건 다 '아말피 해안' 때문이다. '아말피 해안'은 어느 믿음직한 기관이 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었다. 귀가 얇아 그런 거에 잘 넘어간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한다는 말에 이미 반 이상 넘어갔고, '아말피 해안'을 검색해서 사진을 찾아보고는 홀랑 다 넘어가는 데 3초 정도 걸렸던 거 같다. 바다를 마주한 절벽에 색색의 집들이 자유롭고도 빽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세월 쌓여온 아름다움이 있었다. 흉내 낼 수 없는 광경 한가운데 내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간질간질 설레었다. 누가 죽기 전에 꼭 가보라고 하지 않았어도 절로 가보고 싶어질 만한 곳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여행지였기 때문에 숙소 잡기가 쉽지 않았다. 아말피 해안가에 묵으며 창문만 열면 펼쳐져 있는 바다를 매 순간 마주할 수 있다면 최고였겠지만, 두 백수 여행자에게 해안가 숙소는 단호히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비쌌다. 우리는 그 지역에서 제법 긴 2주의 시간을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에 싼 숙소를 구하는 게 중요했다. 이왕이면 한 숙소에 2주 동안 지내며,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그 동네에서 살아보는 흉내를 내고 싶었다.
그 로망을 예산에 맞추다 보니 점점 핵심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예산이 허하는 범위에서 숙소를 찾는 중 깊은 산속에 있는 Vico Equence라는 동네의 예쁜 노란색 집을 발견했다. 아말피 해안의 핵심 관광지인 포지타노까지 걸어서(후에 알고 보니 '걷는' 수준이 아니라 '절벽을 타는' 험한 등반길이었다) 30분, 차로는 40분 정도 걸렸다(걷는 것보다 차로 더 오래 걸리는 이유는, 그만큼 길이 굽이굽이 쳐 엄청 돌아가기 때문이다). 교통편은 불편하지만 차를 렌트할 계획이었으니 감수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집이 예뻤다. 장기 숙박자 찬스를 써서 가격도 더 깎았다.
쏘렌토 시내에서 우리가 머물 집이 있는 Vico Equence까지 렌터카를 타고 갔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길과 길이 접힌 듯이 극단적으로 굽은 커브를(커브길 각도가 체감 10도) 수 십 개 넘어서, 옆 절벽으로 떨어지면 바로 천국 갈 높이의 도로를 타고, 차선 하나 없는 좁은 도로를 4차 고속도로를 달리듯 질주하는 현지인들에게 연신 미안해하며(살인적으로 높고 좁은 그 도로에서 계속 추월당했다), 멀미 잘 안 하는 내가 진심 토할 것 같은 상태가 되어서, 이 곳에서 2주를 머물기로 한 건 이 여행 시작하자마자 짐 다 잃어버린 것 다음으로 치명적인 고난인 건가까지의 생각을 할 즈음, 우리가 2주 동안 살 그 예쁜 노란 집에 도착했다.
웬만한 강원도 산골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깊은 산골에 위치한 동네였는데, 우릴 맞이한 호스트 부부는 젊고 세련된 이탈리안 부부였다(흙 묻은 작업복을 입은 중년부부일 거라 상상했었다). 우리가 도착할 시간 즈음에 그들도 어디선가 차를 타고 왔다. 마을에서 파티가 있었다고 했다. 둘의 복장은 무척 근사했다. 우리 때문에 파티 중간에 나와야 했던 거 아닌가 싶어 미안하다 했더니, 덕분에 빨리 나와 일찍 잘 수 있어서 좋다며 활짝 웃었다.
예쁜 집과 마당을 둘러보며 오는 길에 품은 고통이 가라앉을 즘, 호스트 분이 환영 선물이라며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가져다주셨다. 토마토는 자신이 직접 재배한 것이고, 모짜렐라 치즈는 오늘 막 만든 것이라 했다.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는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지만, 그때 맛 본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는 완전히 새로운 맛이었다. 그 맛을 다시 느끼려면 이탈리아까지 가야 한다는 점에서 무척 애달파진다. 예쁜 노란 집, 근사한 호스트 부부, 충격적으로 맛있는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로 이 집에 온 게 행복하기만 한 상태가 되었다. 이럴 땐 내가 쉬운 사람이라 좋다.
우리가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또 다른 점 중 하나는 '빨래'였다. 여행을 시작하고 약 2주가 지난 시점이었고, 그동안 우리는 빨래할 여력이 없었다. 쌓여있던 빨래에는 독일에서 데려온 먼지, 매일 쉼 없이 걸으며 흘린 땀, 짐 분실 문제로 속앓이 하며 흘린 눈물, 프로치다 섬에서 베인 바다 짠내 등이 잔뜩 묻어있었다.
빨래 돌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니, 이 시간이 여행 시작 후 2주의 강행군 뒤 찾아온 첫 재정비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좋은 초록빛 마당에 우리의 옷을 널었다. 낯선 숙소였던 이 곳이 우리의 공간이 되었다는 표시 같았다. 여행지에서의 빨래는 지친 여행자를 쉬게 해 주고, 그리웠던 일상 속의 자신을 만나게 해 주었다. 일상에서의 빨래는 그냥 귀찮은 집안일이었는데 말이다.
2주 동안 이 집을 거점으로 두고, 가고 싶던 곳을 열심히 다녔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한다는 아말피 해안 도시도 구석구석 다녔다. 넓은 지역이 아니다 보니 다닐 만한 곳을 얼추 다 다녀도 시간이 남았다. '시간이 남는다'는 게 신기하고 든든했다. 여행지에 가면, 그 날의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오늘 내가 놓칠 것들이 아쉬워져 스스로를 재촉하게 된다. 그 아쉬움과 조급함이 내가 여행자 모드일 때 익숙하게 다루어야 할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시간을 가졌다.
큰돈과 시간을 투자해 여기까지 와서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는 게 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한 사치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별 것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어떤 멋진 관광지를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가만히 멈춰있는 시간을 갈망했다. 매 순간을 특별하게 보내야 하고, 새로운 자극을 흡수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싶을 때였다.
그렇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유명한 여행지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은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곳을 빨빨거리며 다닌 다른 시간들만큼이나, 아무 데도 가지 않은 이 시간이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노란 집에서 늦잠을 잤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새소리에 일어났다. 느긋하게 커피를 끓이고, 아점을 준비해 마당 테이블로 나갔다. 커피와 오랜만에 마주한 느긋한 공기를 함께 마셨다. 초록 식물과 파란 하늘이 이룬 쾌청한 장면을 보며 예성과 함께 아침 기도를 드렸다.
해가 뜨거워지자 예성이는 침대에서 책을 읽겠다며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집안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글을 썼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으나, 배고픔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장을 보기 위해 동네 슈퍼로 산책을 갔다.
이 산골 동네에는 커다란 마트 같은 건 없었다. 말 그대로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많은 구멍가게이다. 그래도 꼭 필요한 게 있으면 주인에게 따로 부탁을 할 수 있었다. 주인분이 3일에 한 번 시내 큰 마트에 내려가서 손님들이 요청한 물건을 사다 주셨다. 우리는 한국 음식이 그리운 나머지 시늉이라도 할 겸 간장을 부탁했다. 고추장도 부탁드렸으나 그런 건 처음 들어본다고 하셨다. 어쨌든 3일 뒤에 간장을 찾으러 오기로 약속하고, 올리브유, 토마토소스, 마늘 파우더, 야채, 파스타면 등 온갖 파스타 재료를 사서 돌아왔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나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화투를 쳤다. 화투는 내가 이길 때까지 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예성이는 점점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나는 이탈리아 남부의 산속 노란 집에서 화투의 맛을 알아버렸고, 예성이는 도망갈 데가 없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밤이 되면 심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밤은 길었다. 화투로 성이 안 찬 우리는 그 밤에 '나의 아저씨'라는 상자를 열었다. 그렇게 이틀 만에 나의 아저씨 16회 전 회를 다 봤다. 명작이었다. 그렇게 별 거 없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어디든 가야 할 것 같은 그 장소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았던 시간을 떠올리니, 뭐든 해야 할 것 같아 분주했던 오늘을 사느라 헐떡이던 내 숨이 천천히 쉬어진다. 가끔의 머무름은 꼭 필요하다. 대가를 치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