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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 Jan 29. 2023

아침 8시에 불닭볶음면을 끓인 이유

첫 실패의 얼얼한 그 맛

첫 실패의 얼얼한 그 맛


처음 도전해 본 그림책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4년 동안 그림책 작가 지망생으로 살며 수백 번 상상한 실패인지라 각오가 되어있었지만, 막상 그렇게 쿨하지는 못했다. 타격감을 고스란히 느껴 휘청했다. 맞을 걸 알았다고 맞았을 때 덜 아픈 건 아니니까. 떨어졌다는 결과를 본 뒤 애써 숨을 고르며 아이 등원 준비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는 아이를 보는데도 자꾸 눈물이 차올라 목이 멨다. 눈물까지 날 줄은 몰랐는데.


아이와 남편이 집을 나선 뒤에 온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는 일단 불닭볶음면을 끓였다. 그냥 반드시 먹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비가 올 때는 빗소리가 전 튀기는 소리와 비슷해서 전이 먹고 싶어진다고 했다. 불닭볶음면의 얼얼한 맛이 내 실패의 얼얼한 맛과 닮았었나보다. 그래서 모닝 불닭을 참을 수 없었다.


불닭볶음면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난 안 되는 건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혼자 끙끙거린 시간이 길었으니 이제는 좀 성취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는데. 별로인 것을 만드느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한 건가. 그림책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시간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얼얼한 실패의 맛을 곱씹었다.


그런데 문득 이 실패의 맛이 내가 처음 느낀 맛이란 걸 깨달았다. 그림책 영역에서 난 성공 경험도 없지만, 실패 경험도 없었다. 첫 실패도 없이 바로 성공하는 기적 같은 게 일어났다면 물론 좋았겠으나 그런 기적은 없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 뭐가 한 번에 잘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제일 아래에서 아등바등 올라가야만 했다. 그러니까 기적이 없다는 건 큰일은 아니다. 내 인생에서는 왕왕 있던 서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 안에 머금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던 실패의 맛을 조금은 삼킬 수 있었다.



실패의 효과


첫 실패를 삼키니 나름의 효과도 있었다. 없었던 용기를 짜낼 수 있었기에.


4년 동안 첫 그림책을 가지고 끙끙거리는 중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피드백을 받는 걸 굉장히 두려워했었다. 일단 내가 좋아서 만드는 그림책이기에 그 마음을 지키면서 작업을 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그림책을 만들 생각을 하면 온 근육이 굳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은 혼자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해보자는 게 날 압도하는 평가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실패를 맛본 뒤에는 이제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한 상황이라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현실을 직면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기에는 아까워서 뒤로 갈 곳이 없으니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덕분에 더 적극적으로(지극히 내 기준의 적극) 꺼내서 피드백을 받을 용기가 생겼다.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요즘 석 달 짜리 그림책 제작 수업을 듣고 있어서 그 수업의 선생님께도 피드백을 부탁했다. 적나라한 피드백에 뼈 맞는 아픔을 느꼈지만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니 후련하기도 했다. 덕분에 처음 그림책보다 더 나은 버전의 그림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혼자서는 가지 못했을 곳으로 한발 더 나아간 기분이었다. 역시 성장하려면 껍데기를 깨고 나가야 하는 아픔이 있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까지 성장해야 할까? 그냥 성장 안 하고 그냥 사는 삶이 안락할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된 이상 안 할 수도 없다.



실패의 부작용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


선택받지 못한 실패는 용기와 세트로 두려움도 심어 줬다. 크게 두 가지 두려움을 심어줬다.


첫 번째는 내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만드는 이것이 결국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가치 없는 것을 위해 들인 내 시간, 에너지, 결국 나 자신까지도 가치 없어지는 망상이 날 괴롭혀 필요 이상으로 쪼그라들었다. 다행히 그건 망상이란 걸 알았다.


그 망상을 깨뜨리는 방법으로는 친구가 제게 얘기해줬던 한 문장이 효과가 좋았다. 그때도 아마 내가 그림책을 만들다가 힘든 어느 날이었을 거다. 그때 친구는 날 격려하며 “다정아, 이제 너에게 오는 좋은 말들을 그냥 믿어."라고 말해줬었다.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귓등으로도 안 듣던 날 향한 칭찬을 떠올렸다.


그림책을 완성하고 처음 보여줬던 한 친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게 말했다. 이 그림책을 보고 분명한 위로를 받았다고. 이제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친구들이 제 그림책을 보고 메신저로 전해준 칭찬들을 굳이 캡처까지 하며 저장했다. 이 세상에 네 책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고 그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는 말. 네 책은 이미 좋은 길로 가고 있다는 말. 평소 같으면 그래도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목소리가 훨씬 커서 잘 들리지 않았을 칭찬들인데, 이제는 그런 따스한 칭찬을 수집해서 마음속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내 책은 가치 없다”는 속삭임의 볼륨이 줄어들었다. 덕분에 나 자신도 다시 내 책을 가치 있게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기꺼이 선택할 만한 책이란 걸 기억하기로 했다.


두 번째 두려움은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그림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까지 오랜 고민과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어도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더 이상 해나갈 힘이 나지 않을 때가 올 거 같았다. 그게 무서워서 또 마주할 실패가 두려워졌다.


그냥 적당히 내 선에서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길들을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한 길들을 찾아내도 결국은 다시 마주하게 될 실패라는 걸 알았다. 이미 지난 4년의 시간을 날 안전하게 두려는데 집중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림책을 좋아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날에는 그냥 어쩔 수 없다는 심심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고. 이렇게 된 이상 일단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해봐야 계속 좋아하든 싫어하든 제 마음을 선명히 알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한발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그 끝이 벼랑 끝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말이다.



한 걸음 더


마음을 다잡고 출판사들을 만나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했다. 공모전에 떨어지면 가려고 신청해두었던 행사였다. 130여 명의 작가가 30곳의 출판사 중 추첨을 통해 6곳의 출판사를 만날 기회였다.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강당에 있으면서 15분씩 6개의 출판사를 만났고 그 중간중간 더 긴 대기시간을 견뎠다. 내 미팅 순서가 오기 10분 전마다 계속 “괜찮아. 별거 아니야. 오히려 좋아.” 이런 말을 주문처럼 걸었던 거 같다. 


내가 만날 6곳의 출판사를 제비뽑기로 뽑고, 15분씩 만나는 긴장의 한 복판


택받고자 하는 간절함과 최선을 다하는 긴장감으로 꽉 찬 강당의 공기가 내겐 좀 무거워 틈 날때마다 비상계단 쪽에 앉아 숨을 돌렸다. 어쨌든 할 수 있는 걸 진심을 다해 한 거 같다. 내 그림책을 들고 전문 편집자들을 만나는 과정은 쿵 하는 타격도 있었고, 의외로 토닥토닥 보듬어지는 기분 좋은 순간도 있었다. 내 한계를 직면하기도 했고, 잘하고 있는 부분들을 인정받기도 했다. 서로 다른 편집자들이 주는 피드백 중 겹치는 피드백도 있었고 상반되는 피드백도 있었다. 다채로운 사람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들으며 내가 찾아야 할 건 어디에도 없을 정답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답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함께할 가능성을 내비치는 출판사들을 만나기도 해서 힘이 났다. 내가 만든 것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무용지물은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실패를 삼켜가며 직면하지 않았다면 갖지 못했을 확신이다.


벼랑 끝을 각오하고 어렵게 뗀 한 발짝 끝에 다시 다음 발짝을 뗄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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