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 카프리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웬만한 곳은 다 가본 것 같아 여행의 의욕이 시들해질 즈음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카프리 섬은 꼭 가자고 마음을 먹었다. 카프리 섬에 가는 날, 그동안 이탈리아 남부를 누빌 때 함께했던 렌터카를 소렌토에 있는 렌터카 업체에 반납하기로 했다. 차를 반납한 뒤 카프리를 구경하고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려고 가는 길, 작은 경차 안 공기가 제법 무거웠다. 나와 남편은 사실 긴장 상태였다. 차를 렌트한 첫날, 듣도 보도 못한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피한다는 게 옆 바위에 지나치게 바짝 붙어서 차 아래쪽 옆면이 바위에 긁혀 버리고 말았었다. 차 보험을 들기는 했지만 렌터카 사고가 난 것도 처음이다 보니 막연히 걱정이 되었고, 이 낯선 외국에서 괜히 보상 덤터기를 쓸까 두렵기도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렌터카 사무실에 들어갔다. 예성과 딱히 짠 적은 없지만 둘 다 한마음이 되어 태연한 척 차 긁은 걸 숨기고 조금이라도 빨리 렌터카 사무실을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렌터카 직원은 차 상태를 확인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서류 하단에 사인만 하고 돌아가라고 했고, 우리는 기회를 놓칠세라 서둘러 사인을 하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남편과 난 너나 할 것 없이 경보 수준으로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렌터카 사무실에서 300미터 정도 벗어난 뒤에 우리를 쫓아오는 사람이 없나 흘끗 확인하고는 길모퉁이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잔뜩 겁 먹은 서로의 모습이 우습기도 해 껄껄 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침묵이 흘렀다.
찝찝했다. 돈이 나갈 것이 두려워 우리의 실수를 숨긴 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마지막 여행지인 카프리 여행을 앞두고 이런 무거운 마음인 게 싫었다. 카프리가 줄 감동이 이 찝찝한 무거움 때문에 줄어들 것이 확실했다. 예성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니, 예성이도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도망쳐 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다시 되돌아온 우리 둘을 본 렌터카 직원은 무슨 일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 우리를 맞았다. 다름이 아니라, 사실 우리가 이 차를 운전하다가 바위에 차를 긁었고, 보험을 들기는 했지만 혹시 우리가 보상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건지 확실히 알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렌터카 직원은 활짝 웃으며, 너희가 든 보험 상품이 다 커버해 주는 정도의 사고라 걱정할 거 없다고 돌아가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그 사무실을 나왔을 때의 우리는, 몇 분 전 처음 그 사무실을 나설 때의 우리가 아니었다. 숨기고 싶은 둘만의 비밀을 가지고 도망칠 때는 그 비밀이 무거운 짐이 되어 억눌렀는데, 그 비밀을 정직히 고백하고 나니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그렇게 편안한 상태가 되니 비로소 카프리로의 소풍을 갈 준비가 되었다. 같이 꺄르르 거리며 카프리로 향하는 배를 타러 선착장으로 갔다. 별 거 아닌 작은 해프닝이기도 하지만, 내겐 정직함이 줄 수 있는 선물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정직이 준 기쁨을 안고 향한 카프리였다.
카프리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골목골목을 걸었다. 걷다 보니 허기져서 빵집과 젤라또 가게에 들르고, 예쁜 가로등, 운치 있는 돌담, 흐드러지게 핀 꽃 같은 걸 눈과 사진에 담으며 많이 걸었다. 아름다운 것 옆에 아름다운 것이 즐비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다를 만났다. 바다로 목적지를 둔 적 없어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바다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섬의 매력이다. 카프리 바다 앞 파라솔에 앉아 음료를 주문했다.
파라솔에 앉아서는 한없이 바다를 보고, 사람들을 보며 쉬었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도 수영복을 챙겨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섬에 놀러 가면서 수영복 챙길 생각을 하지도 못한 우리. 바다가 낯선 만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카프리 섬 정상에 오르는 리프트카를 탔다. 정상에서 카프리 섬을 보고 내려오니 소렌토로 돌아가는 배를 타야 할 시간이 가까웠다. 섬 위 쪽이라 걸어서 항구까지 내려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려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제 돌아가는 배가 마지막 배라서 다들 돌아가는 배를 놓치지 않으려고 버스 정류장이 인산인해였다. 과연 배를 탈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며 작은 미니버스에 간신히 껴 탑승했다.
선착장에 도착해 급히 표를 끊었다. 그런데 거스름돈을 세어보던 예성이 표정이 굳어졌다. 매표소에서 표를 팔던 사람이 거슬러 준 돈이 우리가 받아야 할 돈에 한참 못 미쳤다. 급한 와중에 예성이는 다시 돌아가 거스름돈이 잘 못 되었다고 이야기했고, 그 매표소 직원은 어떤 대꾸나 반응 없이 우리가 받아야 하는 금액을 물어보지도 않고, 정확히 그 금액만큼 매표소 창구로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외국인한테 상습적으로 거스름돈을 속여서 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분이 확 상했다. 누군가가 거짓된 행동으로 우릴 속이려 했다는 사실이 우리가 카프리에서 보낸 시간까지도 상해버리는 것 같았다. 정직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런 퀴퀴함이 남는다는 걸 느꼈다. 그 매표소 아저씨는 우리가 경험한 카프리까지 오염시켰다. 그렇게 속임수로 채운 그의 주머니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이날 오전에 우리가 정직을 선택하며 느낀 산뜻함이 맞는 선택이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정직, 어느 도덕 책에서나 나올 거 같은 그 지루한 단어가 너무도 생생하게 실감났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