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여행 : 두브로브니크와 차브타트
스물네 살쯤 TV에서 한 여행 프로그램을 봤다. 출연자들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광장에 있는 오래된 건물의 2층 창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한국인 부부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출연자는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됐냐는 질문을 던졌고, 창문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그 부부는 둘이서 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내게는 애인이 있었다. 언젠가 이 사람과 결혼하면 둘이서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로망을 그 TV를 보다가 품었다.
그 후 5년 뒤에, 나는 로망의 근원지였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광장에 내 남편이 된 그때의 애인과 함께 와 있었다. 우리도 둘이서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철없이 품었던 로망이 어느 날 진짜로 실현되었다는 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감격을 머금고 있다는 것은 꼭 향수를 뿌린 것만 같아서 두브로브니크의 도착한 처음엔 짙은 감격의 향기에 취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빛바랜 아이보리색 건물과 주황색 지붕으로 둘러싸인 곳을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바다가 나왔다. 낮에는 햇빛이 하얀 건물과 바닥에 반사되어서 더욱더 눈부셨고, 밤에는 야경의 불빛이 반사돼서 그런지 또 눈부셨다. 진주 같은 곳이었다. 머무는 내내 틈만 나면 구시가지로 산책하러 나갔다.
하지만 같은 것을 계속 보다 보니 향수 향기 날아가듯 처음의 감격도 차차 증발했다. 아쉬운 일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감격을 충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둘 다 수영을 잘 못 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튜브가 있으니 든든했다. 수영복을 입어 본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두브로브니크의 백화점에 가서 수영복까지 샀다. 유튜브로 수영하는 법을 보며 예습도 했다. 튜브에 바람도 가득 불어 넣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조금은 긴장을 한 채 해변으로 걸어갔다.
해변 앞에 도착한 순간, 당장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해변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그중에 튜브를 들고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꼬마 아이들도 자유롭게 바다를 수영하고 청년들은 절벽 바위에서 바다로 다이빙까지 하는 판이었다. 그곳에서 유일한 동양인 둘이 튜브를 들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숨고 싶었다. 저 사람들이 볼 때 우리가 우스워 보일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이 바다는 우리가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곳이다. 그 사실이 용기를 주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이 바다에 뛰어들기로 했다. 물론 튜브를 끼고.
신기하게도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과 부끄러움이 깨끗이 씻겨져 나갔다. 바닥에 발이 닿는 곳에서만 왔다 갔다 하며, 슈퍼에서 급히 산 물안경으로 바닷물 안을 구경하다 보니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보였다. 고개를 들면 산과 하늘과 바다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기대했던 감격 이상이 물결과 함께 왔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해변에서 거의 목욕탕 냉탕에서 할 법한 움직임만 하고 있었지만, 우리만의 방식으로 즐긴 첫 유럽 바다 수영은 새로운 감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첫 해수욕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새로운 바다에도 몸을 담그고 싶어서 버스로 40분 정도 이동하면 나오는 차브타트 라는 작은 동네에 갔다. 계획에 없던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바글거리던 두브로브니크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여유로운 해안 마을이었다. 이곳에 갈 때도 옷 안에 수영복을 입고 나섰고, 마음에 드는 해변이 나오면 입고 있는 겉옷을 훌훌 벗고 바다로 뛰어들기로 했다. 자릿세를 받는 인기 많은 해변을 지나 사람이 별로 없는 해변을 발견했다. 자릿세를 받는 사람도 없었다. ‘여기가 우리의 바다다’ 싶어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두 번째 해수욕이라 그런지 전보다는 남 눈치가 덜 보였다. 그래서 더 자유롭게 만끽했다.
하나의 감격은 오래갈 수 없는 때가 많지만, 또 다른 감격의 기회는 늘 있다는 것을 두브로브니크에서 배웠다. 그리고 그 감격은 익숙했던 것을 깨고 새로운 것을 향해 뛰어들 때 더욱 강렬하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에겐 바다 수영이 그랬고, 즉흥적으로 간 차브타트가 그랬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일단 걱정이 앞서고, 남들 눈치 보기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 내가 이런 감격을 겹겹이 경험하며 점점 뛰어드는 맛을 알게 된 것 같다.
꼭 여행지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의 평범한 오늘 안에서도 주저함을 깨고 시작할 것을 생각해본다. 아직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수영과 자세만 따라 하다 끝난 테니스를 다시 배우고 싶다. 해본 적 없는 건강한 요리도 연습하고 싶다. 새로 읽을 책들과 새로 쓸 글, 새로 그릴 그림도 기대된다. 아이가 보여줄 새로운 성장도 소중히 여기고 싶다. 크고 작은 새로움 속에 평범하고도 감격스러운 일상을 살고 싶다. 크로아티아의 그 바다처럼 나의 오늘도 다시 오지 않을 하루니까.
[KEPCO-ENC Family 1·2월 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