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의 글 중 「다리와 문」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인간의 문화를 분리와 결합이라는 두 형식을 중심으로 고찰한 글이다. 우리는 분리된 것을 결합시키고, 결합된 것을 분리시키면서 자연을 가공한다. 길을 내고 다리를 놓는 것은 전자에 속하고, 집을 짓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집을 짓는 것은 무제한의 공간에서 한 조각을 잘라내어 그것을 나머지와 분리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문이 없는 집은 없다. 문은 분리와 결합을 동시에 뜻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문을 닫고 있으면 외부로부터 차단되고 분리되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바깥세상과 결합할 수 있다. 짐멜은 문을 통해 인간 본질의 양극성을 말하고 싶었다. 인간은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는 것 못지않게 그러한 경계를 박차고 경계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양극성을 지닌 존재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만의 공간에서 안정과 편안함을 누리고, 문을 넘어 세상을 향하는 순간에는 습관의 경직성을 벗어나 무제한의 삶을 향해 열린 마음이 된다. 창문은 문과 다르다. 창문도 안과 밖을 결합시키지만 창문이 추구하는 목적은 거의 전적으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해 있고, 그것도 눈을 통해서만 그렇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쳐다보기) 문은 분리와 결합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면서 인간 삶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계를 고착시켜서는 안 된다. 경계 짓기도 인간의 본질에 속하지만 경계를 벗어나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 역시 역동적인 삶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짐멜이 문에 대해 펼친 이러한 생각은 자발적으로 문 안으로, 또 문 밖으로 나가는 자유 의지를 지닌 개인을 지향한다.
짐멜보다 수십 년 뒤에 벤야민은 이러한 개인을 찾기 어려워졌다고 본다. 개인주의가 점차로 약화되고 있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냉철한 진단의 결과다. 은둔하는 사람이 아닌 한 모든 개인은 여전히 문을 들락날락하지만 그 문은 더 이상 짐멜이 말한 역동성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부를 축적해가는 대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해간 당시 시민계급은 공적인 영역보다 실내로의 칩거를 선호하고, 공동체의 제반 관심사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비더마이어 풍의 집에서 보듯 외부로부터 차단된 포근하고 안락한 공간에 집착하거나, 지난 시대의 온갖 양식으로 실내를 사설 박물관처럼 만들고자 하는 개인들. 이들에게 문은 분리의 성향을 강화할 뿐이다. 벤야민은 이처럼 외부로부터 차단된 문 안의 세계에 집착하는 개인을 '사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부유하지만 개성을 잃은 사적 인간은 문 안쪽에서 직업적 세계와도, 공동체의 운명과 관련된 세계와도 차단되고 또 분리되기를 바란다. 벤야민은 자신도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또 그런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벤야민은 문 안과 문 밖을 동떨어진 세계로 경험했다. 문 안과 문 밖이 모두 부정적으로 회상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견고한 가구로 꾸며지거나 화려하게 장식된 실내는 "낮에는 그렇게도 쾌적해 보였지만 밤에 꾼 꿈에서 악몽의 무대"로 나타나고, 도시의 거리들은 직접 보지 못한 사고와 재난의 현장으로 떠오른다. 벤야민이 어린 시절에 누린 부유 하지만 고립된 주거환경은 문의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에 여행한 나폴리에서 바라본 주거환경은 벤야민에게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북유럽에서는 가장 사적인 일인 가정사가 이곳 나폴리에서는 아프리카 토착민 마을에서처럼 집단의 일이 된다. 거리에 의자, 화로와 제단을 갖춰놓아 방을 재현하듯이, 거리의 소음은 그대로 방으로 밀려들어와서 방은 거리보다 더 시끄럽다. 나폴리에서는 실외의 빛과 실내의 어둠, 거리와 집이 상호 침투한다."(독일어 벤야민 전집 4권) 나폴리의 주거환경은 아직 근대화가 완수되기 이전에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경계가 명확히 그어진 북유럽의 주거환경에 비해 문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나폴리 여행을 하기 전부터, 아니면 그즈음에 벤야민은 고립되고 폐쇄적인 주거 패러다임에 반기를 든 신건축 운동을 알고 있었다. "다공성, 투명성, 야외의 빛과 공기"를 선호하는 신건축은 전면 유리를 사용하면서 외부와 내부의 통합을 지향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러한 통합은 내부를 넘어 외부를 지향하는 정신에 따르고, 일방적인 외부화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방적인 외부화는 일방적인 내부화와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다. 벤야민은 외부로부터 분리된 공간에서 자신만의 문제에 몰두하는 사적 인간뿐 아니라, 개인적 자각 없이 대중을 추종하는 태도도 비판한다. 연인을 만나고 혁명 도시를 경험하기 위해 간 모스크바에서 대중 집회가 일상화된 삶을 못 견뎌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짐멜과는 다른 의미이긴 했지만 벤야민 역시 경계가 아닌 문의 역동성을 새롭게 실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벤야민은 문의 역동성을 문지방에 집약시킨다. "문지방과 경계선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문지방은 말하자면 이행의 영역이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이행하는 지점이 문지방이다. 이러한 성찰을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문과 문지방을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정신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멀티미디어,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우리는 굳이 문을 열고 나갈 필요가 없다. 노트북을 켜면, 스마트폰을 작동시키면 바로 지금 이곳, 문 안은 순식간에 문 밖의 세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려들어오는 정보를 통해 세상과 접하면서 일방적인 외부화가 우세해질 우려는 다분히 있다. 정신적인 의미에서 문의 역동성이라는 잣대를 불러올 필요가 여기서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