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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Aug 22. 2020

벤야민의 종교 비판?

벤야민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를 다녔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유대력으로 신년에 해당하는 어느 날 부모님이 유대교 회당에 데려가고자 했다는 회상은 남아있다. 그런데 이 회상은 독자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경험을 내용으로 담는다. 어느 친척 분을 모시고 교회당에 오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길을 잃고 헤매는 와중에  빠져든 방탕한 심리, '될 대로 돼라'는 식의 불성실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잘 모르는 친척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지만, 당황만을 안겨줄 종교의식에 대한 불신도 작용한 것 같다고 벤야민은 쓴다.  동화된 유대인 집안이라서 종교적 의식을 일상에서 따른 것 같지는 않다.  유년시절 회상에는 그러한 의식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훗날까지 벤야민은 종교적 전통에 얽매인 적이 없었고, 종교적 감정에 쉽게 빠져드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대학생 때 쓴  글 「현재의 종교성에 대한 대화」에서 벤야민은  관성에 입각한 신앙을 강하게 비판한다. 관성에 입각한 신앙은 인간의 모든 체험, 모든 사건, 모든 감정을 신이라는 초월적인 중심과 최단거리로 연결시킨다. 도처에 신이 편재한다는 범신론도 너무 쉽게 종교적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벤야민은  "금박 입힌 감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러한 감정은 관성적인 신앙일 따름이지 진정한 종교적 감정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신과 인간, 정신과 자연이 조화로운 통일성을 이루기는커녕 이원론적으로 찢긴다는 사실은 역사적 경험에 속하고, 진정한 종교적 경험은  이원론적인 분열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기도나 예배와 같은 종교적 의식은 진정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오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전율에 대하여」라는 초기 글에서 벤야민은 기도와 예배가 진짜로 성스러운 몰입을 가져오는지  아니면 고집스럽게 자신의 내면에 머무는 세속적인 몰입인지를 따져본다. 진실함과 겸손함을 통해 신 안에 완전히 몰입하되 정신을 집중시키는 상태에서만 비로소 기도는 성스러운 몰입을 가져다준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성직자의 중개 없이 직접 신과 소통하는 형식으로서 기도의 중요성은 죽 강조되어왔다. 기도가 신과 소통하는 유일한 형식이라면 벤야민이 생각하는 신과의 소통은 아우라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예술작품의 종교적 기원과 연관해서 설명한 바 있다. 종교의식에서 사용된 예술작품은 감히 근접할 수 없게 하는 분위기를 지니는데 그것은 예술작품이 신성의 아우라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현상"으로 정의된다. 종교의식에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예술작품에 일회적으로 머무는 신성((神性)이다.  이러한 아우라적인 소통 방식과 달리  습관화된 예배와 기도는 신성을 아무 때나 불러낼 수 있는 임의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진정한 종교적 경험과 거리가 멀어진다.

  벤야민은 나중에 유물론을 받아들이면서 종교적 범주들을 될수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종교적 경험과 종교적 감정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있듯이, 종교적인 경험과 감정이 반드시 기존의 종교 텍스트와 종교적 관습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벤야민은 끝까지 종교적 경험과 감정에 기반하는 초월주의라는 지평에 머물렀다.  아무리 유물론에 공감하고, 브레히트의 연극적 실천을 지지했다고 해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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