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은 침묵과 수다를 모두 비판한다. 침묵하는 인물의 문학적 전형은 벤야민이 비평한 괴테 소설 『친화력』에 나오는 오틸리에이다. 이 소설에는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라는 재혼 부부,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 샤를로테의 조카 오틸리에가 나온다. 탄탄할 줄 알았던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관계는 에두아르트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돕고자 그를 장기 투숙 손님으로 집에 초청하고, 샤를로테가 기숙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조카 오틸리에를 집에 불러들이면서부터 깨어지기 시작한다. 산과 알칼리처럼 결합해서 안정을 이룬 결합물이라도 더 친화력이 있는 다른 원소를 만나면 새로운 결합을 하게 되듯이,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샤를로테는 이성적이고 유능한 대위 오토에게,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에두아르트는 말없고 내성적이면서 감정이 풍부한 오틸리에게 끌린다. 그러나 화학반응에서의 친화력과 달리 남녀관계에서의 친화력은 결혼과 같은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위기의 시작이 된다. 샬로테와 대위는 사회적 관습을 고려하고 의무감에 따라 사랑을 체념하기로 결심한 반면, 에두아르트는 자신의 격정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 한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가 서로를 각각 오틸리에와 오토라고 상상하면서 나눈 육체적 결합에서 아이가 생기고, 에두아르트는 현실을 도피하고자 전쟁에 지원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와 결합하고자 하지만, 아기를 정성껏 돌보던 오틸리에의 실수로 아기가 물에 빠저 죽자 오틸리에는 죄책감, 도덕적 의무감, 식지 않는 사랑의 열정 사이에서 번민한 끝에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이에 절망한 에두아르트가 오틸리에를 따라가면서 새로운 친화력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죽음의 길을 가는 오틸리에라는 인물에 대해 벤야민은 비판적이다. 당대의 괴테 문헌학은 오틸리에를 자연적 순진무구함, 성스러움, 비극성 등의 수식어를 붙여 숭배한 반면, 벤야민은 아이가 물에 빠져 죽은 뒤 침묵에 빠져 삶을 포기하는 오틸리에를 죽음의 본능에 휩싸인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죽음에의 의지는 그녀 자신에게도 모호한 채로 있어 그녀는 이를 명백한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죽고자 하는 결심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은 유언장을 쓰는 일일지 모른다. 소설에서 오틸리에는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철저히 거부한 채 침묵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태도를 운명 앞에서 자기희생을 결심한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식음을 전폐함으로써 저절로 생명이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라고 본다.
"어떠한 윤리적 결단도 언어로 표현되지 않고는, 엄밀히 말하자면, 언어 형태 안에서 전달의 대상이 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오틸리에의 완벽한 침묵은 그녀를 고취시킨 죽음에의 의지를 도덕적으로 의문시하게 만든다."
오틸리에의 침묵은 자신이 처한 사태와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명확한 인식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에는 언어에 대한 벤야민의 근본적 성찰이 깔려 있다. 벤야민은 언어에 대한 글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언어 속에서 전달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인식은 언어라는 매체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벤야민은 명백히 한다. 벤야민의 언어관에 의하면, 언어는 무엇을 전달하는 통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내용을 넘어 언어 '속'에서 직접적으로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는 매체이다. 우리가 쓴 글씨가 그 내용을 넘어 우리의 성격을 드러내는 필적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언어 속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차원은 언어화가 고도화가 될수록 그만큼 더 확장된다. 자서전이나 일기로 자신의 삶을 언어화하면서 과장, 축소, 왜곡, 허구화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서전에서도 쓰인 것, 전달된 것을 넘어서는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필적에서 성격을 발견하듯이. 그러나 언어화가 명확하고 진실될수록 그만큼 전달된 내용뿐 아니라 언어 '속'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차원도 확장된다. 따라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적으로 가장 명백하게 언명된 것이 가장 정신적인 것이 된다." 우리가 말을 하는 데 성공할수록 우리의 말은 우리가 전달하고자 한 것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지 못한 본질을 읽어낼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침묵을 수상쩍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 반대편의 수다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늙은 성직자인 미틀러는 오틸리에를 사랑하게 된 에두아르트에게 "남자의 품위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불행한 가운데서도 정신을 차려야 하며, 흥분하지 않고 태연하게 견뎌서 고귀한 사람으로 존경받으며 모범이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충고한다. 이 충고에 대해 에두아르트는 "행복한 사람, 팔자 좋은 사람들은 말 한번 잘하더군요... 팔자가 늘어진 사람들은 무한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어떤 위로도 천박하게 느껴지고 절망이 의무처럼 되는 그런 경우들도 있어요."라고 대꾸한다. 미틀러의 말은 무한한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이 어떠한 고통인지 인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말이기 때문에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전해진다. 그 말은 구체적인 사태에 대한 인식을 담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수다의 기원은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로 상징되는 선악에 대한 물음에 있다. "창조 이후의 세계에서 선악의 물음은 수다였다."(「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판단하는 말", "수단으로써의 말", "허영을 추구하는 말", "추상적인 말"은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미틀러가 하는 말이 수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내 삶의 직물 속에 짜이지 못하는 조언은 수다에 그치기 때문이다. 조언을 구하려면 먼저 자신의 삶을 말로 적절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언은 내 삶의 직물에 함께 짜여든 지혜가 될 수 있다.
말로 적절히 표현하는 데 성공할수록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예감의 폭이 커진다. 침묵을 깬다는 것은, 말이 주어져 있지 않던 영역을 새롭게 열어젖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말이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는지는 2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침묵을 뚫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말은 자칫 수다가 될 위험에 직면해있기 때문에 말의 이중적 측면을 우리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을 '통해' 전달되는 측면과 동시에 말 '속'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차원,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해야 한다. 말이 어렵사리 구원과 해방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말에게만 그러한 힘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벤야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던 초기의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기술한다.
"말이 거부된 영역, 말이 존재하지 않던 영역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순수한 힘으로 열리는 곳에서만 마법의 불꽃은 말로부터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이 순간 말과 행동은 똑같이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여 하나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