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헤세의 여행노트 〈방랑〉(독일어 원제 Wanderung: '반더룽')을 읽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영화 〈노매드랜드〉 를 보게 되었다. 1920년에 발표한 〈Wanderung〉과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다 받은 영화. 100년의 시차로 떨어져 있고 장르도 다르지만 정주하지 않는 삶이라는 모티프에서 겹친다.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을 의미하는 '방랑'은 '도보 여행, 이동, 이주'를 의미하는 'Wanderung'의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이 책은 방랑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도 아니다. 알프스 고갯길을 넘어 동경하는 남쪽 나라를 '걷는' 작가. 〈노매드랜드〉 에서 여주인공 펀은 남편에 대한 추억이 깃든 정든 도시를 떠나 캠핑카를 '타고' 다닌다. 걷기와 타기는 똑같이 이동하는 것이지만 풍경을 보는 태도가 다르다. 굳이 폴 비릴리오의 글 「탈것」 을 인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예전에 번역한 글이라 기억이 나서 내용을 떠올려본다. 탈것의 속도가 증가하면 픙경은 점, 선의 스텍터클로 해체되고, "여행은 위치 이동의 전략"으로 전락한다. "직접 움직이면서 얻는 동적이고, 시각적, 촉각적, 후각적 인상의 사실들은 자동차의 창문에 명멸하는 이미지들에 의해서는 복구될 수 없다."(비릴리오) 헤세의 여행노트는 걸으면서 접하는 인상들이 각인된 기록인 반면, 〈노매드랜드〉의 펀에게 차창 밖 풍경은 영사막에 명멸하는 이미지들 같다. 반더룽의 무대는 스위스 남부의 자연과 시골 풍경이고, 영화에서 여주인공의 캠핑카는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고속도로, 미국 중서부의 대자연을 통과해가고 사막 같은 대규모 주차장에 이르러 비로소 정차한다.
헤세가 반더룽에 나선 이유는 정해진 인간관계, 정해진 사회관계, 달성한 목표지점에 고정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삶에서 오는 포만감은 자신을 편협하게 만들고 작가는 이 포만감을 못 견뎌한다. 헤세는 독일 낭만주의자 노발리스(『푸른 꽃』의 저자)를 따라 "모든 여행은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더 큰 고향, 더 큰 자아를 찾기 위한 길. 영화에서 펀이 작은 캠핑 카를 타고 노매드의 삶을 택한 이유는 헤세의 자유로운 여행객과는 다르다. 그녀가 떠난 이유는 현실적이다. 자발적으로 그녀가 택한 제2의 고향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펀은 결혼하면서 집과 고향을 떠나 네바다 주의 엠파이어 탄광 지역에 남편과 함께 정착한다. 남편이 암투병 후 죽은 후에도 펀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것은 탄광이 폐쇄되고 마을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제 3의 고향을 택할 수도 있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그 이유는 먹고사는 문제, 일하고자 하는 욕구와 관계가 있다. 연금을 신청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펀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들은 단순 노무직이다. 그것도 비정규적이고 단기이기 때문에 취업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곳 저곳, 이 도시 저 도시를 찾아다녀야 한다. 펀에게 두 번의 정착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여동생 돌리가 함께 살자고 제안했을 때이고, 다른 한번은 노매드 생활에서 만난 비슷한 연배의 데이브가 청혼했을 때이다. 그러나 펀은 이 두번의 기회를 모두 물리치고 노매드의 삶에 다시 나선다. houseless지만 homeless는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펀. 그런데 그녀는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립적인 삶을 선택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제2의 고향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곳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지낸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간들이 머물러 있는 기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노매드의 삶을 선택한 표면적인 이유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데 있지만, 보다 깊은 이유는 새로운 고향, 새로운 기억에 의해 옛 고향, 옛 기억이 덮여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정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고향을 새로 만드는 것이고 새로운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펀에게는 언제나 비애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친다. 진정한 고향이었던 제2의고향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비애. 이 비애 때문에 유목하는 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헤세는 "아침과 저녁 사이에서 하루가 지나가듯 여행에 대한 충동과 고향을 갖고 싶은 소망 사이에서 나의 삶은 흘러간다."고 했다. 펀도 이러한 갈등을 알고 있지만, 펀을 더 깊이 추동하는 것은 상실한 제 2의 고향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그래서 늘 떠나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그러한 기억. 헤세의 여행객도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나는 여행객이고 고향에 대한 소망보다는 여행에 대한 충동을 따른다. "언젠가는 여행과 먼 나라가 내 영혼의 일부가 되고 언젠가는 내 안에 고향을 지니게 되어 더는 정원과 집에 추파를 던질 필요가 없는 날도 올 것 같다. 자기 안에 고향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중심이 잡히고 그 중심에서부터 모든 힘이 솟구칠 것이다." 헤세의 여행객은 자아를 확대하고 세상을 보다 깊고 다양하게 이해함으로써 자아와 세상의 비밀에 도달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성숙한 경지에 도달한 여행객은 낯선 고장, 낯선 문화, 낯선 환경이 주는 도취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Wanderung」 중 다음 구절을 옮겨본다.
"첫 남국 여행 때의 도취... 이제 더 이상 그런 도취는 없다. 낯선 지방이 보내오는 인사는 이제 내게 다르게 들려오며 내 가슴 속에 울리는 그 반향도 잠잠해졌다. 나는 공중으로 모자를 던지며 노래를 부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소를 짓는다. 입으로만 짓는 미소가 아니다. 영혼으로, 눈으로, 온 피부로 나는 미소를 짓는다. 향기를 실어다주는 그 나라에 대해 옛날과는 다른 의미를, 좀 더 섬세하고 고요한, 좀 더 예민한, 좀 더 감사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 모든 것이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나의 것이 되어 더욱 풍요롭게 수백 곱절의 뉘앙스를 갖고 내게 말을 건넨다. 취한듯한 그리움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베일에 싸인 먼 나라 위에 꿈의 색깔을 칠하지 않는다.... 보는 것을 배웠으니까. 이후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현대판 유목민 펀에게 낯선 것은 따로 없다. 낯선 것의 경험이 이미 일상의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쉽게 유목하는 도정에 나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든 사람이 유목에 나서지는 못한다. 그대신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멋진 용어를 스스로 적용하며 노매드를 자처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