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가까운 지인이던 저널리스트 크라카우어는 「어느 파리 거리에 대한 기억」이라는 단편에서 산책자의 이상한 경험을 묘사한 적이 있다. 파리의 어느 뒷골목을 헤매는 산책자는 허름한 호텔 방 창문 옆을 지니다 그 안에서 한 젊은 남자의 모습을 본다. 반쯤 열린 트렁크, 손을 머리에 대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꼼짝도 하지 않는 젊은 남자의 주위에는 이런 저런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다. 호텔방의 이러한 구도는 어떤 그림과 유사하지 않은가?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이다. 그림 한가운데 앉아 있는 천사, 마방진 등 주변에 흩어진 소도구들. 크라카우어의 산책자는 악몽이라도 꾼 듯 골목을 황급히 빠져 나온다. 차들로 붐비고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로 나오면서도 산책자는 그 남자에 대한 인상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다 학교를 마치고 나온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아이들을 따라 다시 들어간다. 마치 반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제성이 작용하기라도 하듯 산책자는 방금 도망치다시피 빠져 나온 그 현장으로 되돌아간다. 여전히 호텔 방의 남자는 그 자세로 앉아있고 주민들도 창문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산책자는 다시 악몽을 꾸는 것 같다. 그는 유일하게 악몽을 떨쳐버리게 해주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마치 옷자락을 붙잡듯 매달린다." 산책자는 호텔방 남자를 보는 순간 뒤러의 그림을 떠올리면서 멜랑콜리를 그 젊은 남자에게 전가시킨다. 그러나 그가 남자에게 전가시킨 불안과 벨랑콜리는 자신의 불안과 멜랑콜리이다. 산책자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흥분과 도취를 통해 멜랑콜리를 억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필연코 귀환한다. 도취를 통해 벗어나고자 한 멜랑콜리는 사실 도취와 짝을 이루는 심리상태이다. 병적인 흥분과 도취는 멜랑콜리로 이행하고, 멜랑콜리를 벗어나기 위해 다시 도취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취와 멜랑콜리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원은 동일하다. 그것은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의식이다.
크라카우어가 묘사한 산책자의 멜랑콜리는 멜랑콜리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뜨거운 도취와 차가운 우울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변증법. 벤야민이 보들레르에게서 발견한 멜랑콜리도 마찬가지이다. 『악의 꽃』에서 보들레르는 우울이라는 정서를 바탕으로 한 시들을 소개한다. 보들레르의 우울은 근대 이전의 그 어떤 우울보다 지독하다. 그것은 세상만 파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도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탈가치, 무의미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고 해서 시인이 골방에 박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우울과 멜랑콜리에 빠지는 장소는 파리의 거리다. 파리의 거리는 환상의 공간으로 탈바꿈하지만 그러한 공간에서 겪는 도취는 멜랑콜리와 짝을 이룬다. 보들레르의「일곱 늙은이」라는 시는 "붐비는 도시, 환상이 가득한 도시'로 시작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파리의 변두리 지역을 걷고 있는데, 난데 없이 어느 늙은이가 눈에 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시각각 이 늙은이가 늘어난다. 수염도 눈도 등도 지팡이도 누더기도 똑같은 늙은이들 일곱명이 걷고 있는 듯한 환각이 일어난다. 이성으로 그러한 흥분상태를 가라앉히려고 해도 역부족이다. 일곱 늙은이는 새로운 것과 동일한 것의 겹침, 즉 새로운 것의 이면은 동일한 것의 반복임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다. 「일곱 늙은이」는 도취와 환상으로 끝나지만 결국 우울로 귀착할 것이다. 「백조」에 나오는 시인의 다음과 같은 한탄은 우울이 어떠한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파리는 변한다! 그러나 내 우울 속에서/ 무엇 하나 끄떡하지 않는다! 새로 생긴 궁전도, 돌덩이도, 성문 밖 오래된 거리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변하는 파리에 깊숙이 들어가서 겪는 우울이 중요하다. 벤야민의 말을 들어보자.
"언제나 동일한 것이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최신의 것에서도 세상의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독일어 전집 제 5권, 676쪽)
항상 동일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최신의 것에 시선을 향하면서 그것을 항상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보는 것. 이로써 새로운 것의 센세이션과 항상 동일한 것이라는 악몽이 겹쳐진다. 보들레르는 영원히 동일한 것의 반복에서 비롯된 우울 속에서도 "항상 동일한 것 속에서 새로운 것"을 쟁취해내는 자발성을 발휘한다. 그는 자신은 도박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도박」이라는 시를 썼다. 그가 시 창작을 위해 시인들이 가지고 있던 통상적인 모티프에 머물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자발성의 발로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우울을 높이 평가한 것은 보들레르의 우울이 골방에 갇힌 히키코모리의 우울이 아니라 부단히 변화하는 대도시 속 산책자의 우울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그러한 우울의 원형을 보들레르에게서 발견하고는, 자신의 우울도 그런 식으로 변화시키고자 했을지 모른다. 곁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차리는 자신의 우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