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에 베를린에 다시 가 볼 기회가 있었다. 2003년 초의 마지막 방문 이후 12년 만이었다. 베를린 장벽도 다시 가보았다. 브란덴부르크 성문 앞 광장에 크고 작은 수천 개의 석조 기둥이 세워진 유대인 추념비 사이를 미로처럼 이리 저리 헤매어보기도 했다. 수십년이 지나서도 '홀로코스트를 '잊지 않겠다'는 독일의 기억 정책과 문화는 정말 대단하다.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모든 독일인이 그러한 기억을 달가와하지는 않는다. 인지상정이다. 자신들이 역사상 유례 없는 학살의 가해자로 규정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기 전이었다. 수업 시간에 알게된 한 독일 여학생과 '실러 비제'라고 부르는 도심 속 초원에 갔다. 할말도 별로 없어 뜬금 없이, 또 눈치 없이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햇빛 찬란한 날씨에 왜 그런 어두운 이야기를 하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015년에 처음 가본 유대인 박물관은 그 어두운 이야기를 더 기억에, 아니 몸에 각인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눈으로만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도록 하는
공간 기획이 참신했다. 좁고 천장이 높은 한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24미터 높은 곳에서 한줄기 빛이 내리 비치는 '홀로코스트 타워', 49개의 사각기둥이 세워진 '추방의 정원'도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방은 '낙엽'이라고 불리는 방이다. 어렴풋이 스며든 미미한 햇빛 외에는 조명이 안되어 있는 그 방에는 바닥에 한 가득 만여개의 금속 원판이 깔려 있다. 눈, 코, 입에 해당하는 구멍이 뚫려있는 그 원판들은 유대인의 얼굴을 의미한다고 한다. 바닥을 걸으면 금속 원판들이 부딪혀 소리가 난다. 원판을 밟으면 나는 금속 원판의 부딪히는 소리는 불쾌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관람자의 힘이 야기한다. 그 소리가 절규처럼 들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으나, 관람자는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을 힘을 행사하는 가해자로 체험하게 된다. 과거를 살아있는 과거로 전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대인 박물관에서 보듯이 박물관 문화는 그동안 이 문제를 해결해내는 방식으로 발전해온 것이리라.
벤야민은 박물관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문화사에 대한 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화가 물화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문화의 역사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어떠한 진정한 경험도 되지 못한다. 즉 어떠한 정치적인 경험에 의해서도 관통되지 못한 채 오로지 기념비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진 침전물에 불과하게 된다......따라서 문화사는 단지 겉보기에만 통찰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을 뿐 변증법의 진전에 관한 한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문화사는 인류의 등에 쌓이는 보화의 무게를 증가시키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문화사는 인류에게 그 보화를 뒤흔들어 그 것을 손 안에 넣을 수 있도록 할 힘을 주지는 않는다. "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276-277쪽)
역사를 인류의 등에 진 짐이 아니라 손 안에 넣은 보화가 되게끔 하기 위한 노력은 벤야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와 무관하게 그렇다. 문학비평가로서 벤야민의 글이 지닌 장점과 매력은 등에 진 짐이 아니라 손에 쥔 보화를 제공하고자 한 노력을 여러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