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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Aug 01. 2020

벤야민과 안락한 방


벤야민은 1933년 베를린을 떠나 파리로 망명했다. 나치 정부 하에서 유대인 비평가인 그가 글을 발표할 기회가 막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망명 초기에 이비자 섬에 체류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 망명지인 파리에서 보낸 삶은 궁핍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뉴욕으로 이주한 〈사회조사연구소〉(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알려진 연구소)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거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망명시절 동안 그는 여동생 도라의 집이나 다른 망명인들의 셋집 혹은 싸구려 여관에서 기거했다. 이토록 불안한 주거는 벤야민이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주거에 대해 그가 종종 펼친 성찰은 이러한 실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에는 실내를 무대로 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특히 유년의 벤야민이 많은 시간을 보낸 자신의 방이 자주 나온다. 그렇다고 유년의 방을 동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벤야민은 자신도 누렸던 안락한 방을 비판한다. 안락한 방에 대한 비판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수십년 동안 안정과 소유 관념에 매달려"(『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 83쪽)온 시민 계급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벤야민은 안락한 실내가 오히려 악몽의 무대가 된 유년시절의 꿈을 회상한 적도 있다. 브레히트의 시 〈흔적을 지워라〉라는 시를 다루면서 흔적을 남길 필요가 없는 삶, 방랑자로서의 삶을 옹호하기도 했다.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망명을 떠나기 전에 이 시를 썼는데 벤야민에 비하면 망명지에서 그의 삶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어찌보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아니 남길 수 없는 삶은 정작 브레히트보다 벤야민이 더 철저하게 지킨 셈이다. 벤야민은 안락한 방으로 대변되는 시민계급의 주거문화는 이제 다른 주거 문화로 교체될 시기에 왔다고 보았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한 신건축 운동이 그 답이다. 1920년대 르 코르뷔지에, 기디온 등이 추진한 신건축은 수평으로 넓게 퍼진 전면 유리 창을 통해 내부를 넘어 외부 풍경으로 열린 건축이다. 미궁 같은 내부 대신에 외부의 빛과 공기가 투과하는 내부, 외부로 통합된 내부가 신건축의 핵심이다. 투명성을 지닌 유리는 신건축이 선호하는 신소재였다. 이에 대해 벤야민은 "유리는 어떠한 아우라도 갖고 있지 않다. 비밀의 적, 소유의 적"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안락한 방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은 카프카의 미완성 단편 〈굴〉을 떠올리게 한다. 이 단편에 나오는 작은 동물은 자신의 소유물인 지하 왕국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면서도 안전에 대한 지나친 근심으로 오히려 자신을 해치고 있다. 의인화된 이 동물은 안식과 평화 대신 근심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소시민을 떠올리게 한다. 1920년대 초에 썼지만 미완으로 그친 카프카의 이 단편을 벤야민이 읽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의 아우라 비판을 최종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안락한 방 비판도 마찬가지다. 안락함에 빠져서 공공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이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방 자체를 벤야민이 거부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이러한 복합적인 시각으로 벤야민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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