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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Aug 01. 2020

벤야민과 가난한 사람들

   

 벤야민은 어릴적에 살던 베를린 구서부 지역을 "부유한 사람들이 갇혀 살던 거주지역"이라고 불렀다. 미술품 경매업으로 한때 큰 재산을 모은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의 벤야민은 소시민의 삶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누렸던 것 같다. 유년시절에 대한 벤야민의 회상을 자세히 보면 어릴적 그의 집안의 재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프랑스 인 보모를 두었고, 식사 시간에는 최고급 식기를 사용하고, 포츠담에는 여름 별장이 있었다. 부유한 집 자제들로 구성된 사설 교습소를 다니기도 했다. 같은 지역에 살던 외할머니의 집은 대저택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길거리였다. "가난이라는 이국적 세계로의 답사"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가난의 문화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벤야민. 그런 벤야민이 망명인으로서 파리에서 경험한 궁핍한 삶은 잘 알려져 있다. 1935년에서 1937년 사이에 뉴욕으로 이주한 사회조사연구소에 보낸 편지들에는 경제적인 궁핍에 대한 한탄이 들어있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스스로 물질적인 궁핍을 경험하기 전부터 벤야민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좌파 지식인들과 공유했다. 1920년대에 발표한 『일방통행로』를 보면, 가난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몇 푼 적선을 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해 '부끄러움'을 언급한다.      

"여기서 가장 불길한 것은 관찰자가 느끼는 동정 혹은 관찰자가 자신의 냉정함에 대해 스스로 놀라는 마음도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의 부끄러움이다. 독일의 대도시에서 극도의 빈곤층은 배고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지하는 행인들의 지폐, 그 지페로 행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으로 상처가 난 맨살을 가리고자 노력한다."     

"누구나 자기 혼자 있으면 많은 것을 참아낼 수 있지만, 만약 짐을 짊어진 모습을 자신의 부인이 보거나 혹은 부인이 이를 감당하는 모습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낀다."( 『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86쪽)     


왜 가난한 사람들과 적선하는 사람들 모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일까? 1900년대 초에 짐멜은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상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쓴다.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때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순간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을 느끼고 이어서 어떤 규범을 어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어떤 규범과 어긋난다고 느끼는 방식은 수없이 많다. 우리가 도덕적 잘못을 비난받을 때 느끼는 이러한 어긋남은 도에 넘는 칭찬을 받을 때 느끼는 것과는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자보다 전자에서 그러한 느낌이 더 강렬한 것도 아니다. 겸손한 사람은 칭찬을 들을 때조차 얼굴이 붉어지는데, 이는 자신의 자아가 부각되는 상황에 처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상 사이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간극을 의식하기 때문이다."(『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229쪽)     

     

적선하는 사람들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적선만으로는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과 연대할 수 있다. 벤야민 시대에 그러한 연대는 '지식인의 프롤레타리아트화"라고 불렀다. 벤야민은 뒤늦게 가난을 경험했지만, 이미 그 전부터 벤야민은 그러한 연대의 성격을 냉철하게 뚫어본다. '한겨울 얇디 얇은 외투 하나로 지내본'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통찰이 프롤레타리아트화라는 허상을 깨뜨린다. 기껏해야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지방 위에 서 있을 뿐이다. 그 문지방 위에 서기 전부터 벤야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느낀 감정은 복잡했던 것 같다. 어디서든 가난을 예감하거나 자신이 누리는 풍족함을 미안해하고(「크리스마스 천사」), 가난한 사람들이 보내는 눈초리를 섬뜩한 눈초리로 상상하기도 했다.(「꼽추 난쟁이」). 그러한 눈초리 앞에서 공포심을 느낀 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공포심은 부끄러움을 거쳐 다른 단계로 나아간다. 벤야민의 사상적인 전향은 이러한 감정의 역사를 거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유에서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사유로 전향(사실 전향은 아니다)했다는 점을 학문적인 차원 혹은 인간관계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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