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장소 ㅡ 에르펜베르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동독 출신 여성 작가 예니 에르펜베르크가 젊은 시절인 2008년에 발표한 소설로, 21세기 독일 현대문학의 걸작으로 호평을 받았다. 대체로 이 소설은 고향을 주제로 한 소설로 해석된다. 이 작가나 이 작품에 대해 전문적으로 해석할 처지는 아니지만 '고향 대신 기념장소'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동독에서 1967년에 태어난 작가는 23살이 되던 해에 통일을 맞는다. 통일을 맞이한 모든 동독 주민은, 그들이 동독의 어느 지역 출신이든, 국가라는 큰 고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기성세대가 된 동독주민보다 청소년기, 청년기에 놓였던 젊은 세대에게 통일이 가져온 정서적 혼란은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청소년기, 청년기는 한 개인의 사회화와 문화화가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시기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그러한 사회화와 문화화의 기반인 국가의 소멸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모든 안정적 기반이 발 아래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경험이고, 고향의 부재에 대한 의식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전무후무한 경험이었다. 고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고향이 소멸하는 순간에 더욱 첨예하게 제기된다. 이 질문에 답하고, 그럼으로써 고향의 소멸에서 오는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가 택한 전략은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전략은, 역사의 시간을 거대한 자연의 시간에 편입시키면서 그 크기를 극소화시키는 것이다. 1930년대에 베를린의 한 건축가가 베를린 남동쪽에 있는 샤르무첼 호숫가에 집을 짓고 여름별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은 20세기 독일의 현대사와 교차하면서 자신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의 굴곡을 겪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화를 거대한 자연사의 리듬에서 보면 그것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사소한 일로 비쳐진다. 인간의 역사를 지구와 우주에서 진행되는 자연사의 지극히 작은 부분으로 극소화하는 이러한 시각은, 큰 역사적 변동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역사적 일 -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실험인 사회주의 체제를 자본주의 체제로 변환하는 실험 - 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형성된 시각이다. 에르펜베르크 뿐 아니라 다른 동독 출신 작가에게서도 보이는 경향이다.
다른 전략은 고향 부재에 대한 상실감 대신 각자의 고유한 기념장소를 갖기로 한 것이다. 통일 후 호숫가 그 집의 소유권을 주장한 서독의 상속인들에 의해 그 집이 철거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은, 그 집의 마지막 주인이 된, 전후 망명지에서 돌아온 작가의 손녀이다. 손녀는 철거되고 소멸된 그 집을 기념장소로 바꾸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기념장소가 되는 것일까? 그러기 이전에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집은 어떤 의미를 지닌 집이었나?
작가는 호숫가의 그 집을 이야기 하기 이전에 건축가에게 땅을 판 촌장의 집안 이야기를 하고, 촌장의 집안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시간의 엄청나게 큰 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만 삼천년 이전으로, 아니 더 이전으로 돌아가 그 지대에 호수가 형성되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지질학적인 변화를 담담하게 기술한다. 작가는 이렇듯 인간의 삶의 시간을 우주의 시간, 자연사의 시간에 편입시키면서 그것이 얼마나 미미한 시간인지를 상기시킨다.
호숫가 그 집에 살던 사람들에게 그 집이 지닌 의미는 상이하다. 그 집을 처음 지은 건축가에게, 건축가의 아내에게, 2차 대전 후 망명지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동독을 택한 여성 작가에게, 그리고 작가의 손녀에게 그 집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건축가에게 그 집은 자신이 지은 '고향 집'이다. 건축가는 대대로 그 땅을 소유해온 대 농장주이자 마을 촌장으로부터 호숫가 땅을 사들인다. 그 집을 지으면서 건축가는 생각한다. 고향 집을 짓는다는 것은, "너울거리며 퍼져 나가는 한줌의 공기를 단단한 암석의 발톱으로 움켜쥐고 잡아채서 고형화"하는 작업이라고. 그것이 성공하면, "고향 집은 제 3의 피부이니, 살갗을 이루는 제 1의 피부와 의복이 형성하는 제 2의 피부 다음으로 밀접"하다고. 그러나 그런 그 역시 고향과 고향집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즉 모든 고향은 시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같이 지금까지의 그의 직업에 속한 세 가지 요소 외에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네 번째 요소인 시간이 그를 호숫가 그 집에서 쫓아낸다. 베를린 프리드리히 거리에 건물을 짓기 위해 서독에서 나사못을 구입했다는 '죄목'으로. 그는 고향집을 3 차원으로만 생각했으나 시간이라는 네번 째 요소는 그를 고향 집에서 추방한다.
순회 공연을 하는 서커스 단원처럼 유목민적인 삶을 동경하던 건축가 아내는 어릴 적 꿈과는 정 반대의 정착 생활을 한다. 호숫가 그 집에서 한결같이 손님을 초대하고, 호수에서 잡은 가재를 요리하고, 여름이면 수영하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지치고, 부활절이면 조카들을 위해 봄꽃들 사이에 달걀을 숨겨놓고, 이처럼 계절마다 한결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건축가의 아내에게 호숫가 그 집은 시간이 흐르는 곳이 아니라 적체되는 곳이다. 그녀에게 시간은 "마치 하나의 집과 같아서", 그녀에게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오늘은 이 방으로 내일은 저 방으로 시간을 찾아가 사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호숫가 집은 시간이 적체되는 곳, 주기마다 시간이 반복되는 곳으로 그녀에게 영원의 한 조각을 선사한 것처럼 보인다. 이차 대전 막바지에 그 집에 러시아 적군 부대가 침입해오기 직전까지는... 그 집의 옷방에 숨어있던 그녀와 그녀를 발견한 젊은 러시아 장교 사이에 일어난 정사 사건은 그러한 영원의 조각에 구멍을 내면서 그곳에서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이차 대전이 끝난 후 동독으로 돌아온 한 여성 작가는 그 사이 인민의 재산이 된 호숫가 집의 임차권을 동독 정부로부터 얻는다. 나치 등장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그녀는 실향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고향의 의미는 땅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있어야 한다고 되뇌이지만, 그녀에게 "향수라는 형태의 절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동독으로 돌아온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고향은 사회주의와 휴머니즘 사상에 따라 만들어가야 할 고향이다. 어쩌면 그것은 고향이 아니라 유토피아이다. 그녀에게 호숫가 집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그곳은 매일 글을 쓰고, 남편, 방문한 아들네 가족과 식사를 나누곤 하는 일상이 차분히 흘러가는 안식처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곳은 그녀가 망명지에서 돌아오면서 생각한, 만들어가야 할 거창한 고향이 아니라 안정과 평온을 선사해주는 곳이 된다.
사람들은 고향을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 혹은 삶의 오랜 터전이 된 장소의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의 고향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구심점과 유대감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고향에서도 고향 감정을 갖지 못하고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가 맞이한 며느리의 할머니가 그렇다. 할머니는 이차 대전 당시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의 고향 땅을 등지고 피난길에 오른 독일인 대열에 속한다.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딸의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른 할머니는 자신은 어디서도 이방인 같았다고 회고한다. 고향에서도. 그래서 그녀는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되는 편이 더 낫다. 자기 집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보다는."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즐겨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고향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작가가 동독 정부로부터 땅이 아닌 집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후 그녀의 손녀는 그 집의 소유권을 할머니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상속받는다. 그러나 독일 통일 직후 건축가 아내의 상속인들이 그 집 터가 있는 토지의 반환 소송을 하고, 소송이 지연되면서 그 집은 방치되고 폐허처럼 변한다. 인상적인 장면은 외국 생활에서 돌아온 손녀가 폐허가 된 그 집에 대해 치르는 이별식이다. 그녀는 호숫가 물을 길어와 먼지 쌓이고 여기 저기 부서진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한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죽은 자를 마지막으로 씻기고 정갈한 의복을 입히는 염과도 같다. 그 집은 철거되고 지상에 더는 물질적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손녀 딸의 기억에 자리잡게 되면서 영원한 기념장소가 된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 집에서 늙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현실로 분명해진 그 순간부터, 과거의 시간이 그녀의 등 뒤에서 무성하게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웠던 그녀의 어린 시절이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성인이 된 지금 다시금 머릿속 잊혀진 기억을 뚫고 하염없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감옥이 되어 그녀를 영원히 그 안에 가두고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작은 고향이 철거되는 순간에 그곳은 이렇게 기념장소가 된다. '그곳'이라는 사실 외에 지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고 있지 않지만. 되살아난 기억은 그곳을 그녀의 유년시절이라는 과거와 결박시키면서 유년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소설 속 손녀와 유사한 체험을 한 작가 에르펜베르크는 기억에 머물지 않고 기억을 문자화하면서 소설을 썼다. 자신의 체험이 깔려 있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조부모가 살던, 자신의 행복한 유년시절이 얽혀 있는 그 집을 기념장소로 만들고 그 집의 기념비를 세운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정체성의 구심점이었던 큰 고향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자신이 살던 터전이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고향 상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작가가 택한 두 전략이 그러한 충격을 완화하는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향 상실 모티프를 이런 식으로 독특하게 다룬 작품은 처음 읽게 되어서 그 소감을 정리해보았다. 내게도 유년의 고향이 있는지, 나만의 기념장소가 있는지를 물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