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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Oct 15. 2020

추억 속 세 가지 이미지와 이미지의 힘

    

"이미지의 힘". 이렇게 쓰면 떠오르는 세 가지 이미지가 있다. 두 가지는 어릴 적 외할머니 집과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저 유명한 모나리자 그림이다. 외할머니 집에는 대문으로 나가기 전에 중문이 있었고 중문 왼쪽 벽에 초상 그림 하나가 붙어 있었다. 까만 먹물로 얼굴 윤곽만 그린 그림인데 특이하게도 얼굴 곳곳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 초상은 할머니를 가리키는 그림이고, 병을 가져오는 악귀들이 바늘에 찔릴까 무서워서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가장 대표하는 신체 부위가 얼굴이니 그럴듯한 설명이 된다. 외할머니 집 작은 마당 한구석에 붙어있던 그 초상화를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에게 물어본 적 없 것 같다. 그런데 할머니 이미지의 주술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이었다. 초상 그림을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는지 지금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의 현상판에대강 인화 수 있다. 신체 부위 중에서 우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 얼굴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짐멜은 이렇게 설명한다. "얼굴은 인간의 영혼이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는 곳이다. 인간의 몸 가운데에서 내적인 통일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얼굴이다. "(짐멜, 「얼굴의 미학적 의미」) 얼굴만 그리지 않고 신체 전체를 그린 그림이었다면? 이미지의 주술적인 힘이 덜했을 것이다.     

기억 속에서 외할머니 초상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이미지는 할머니  방  벽 높이 걸린 금발의 서양 여자 얼굴 사진이다. 그 사진의 출처는 이모의 미용실이다. 어머니의 하나밖에 없던 여동생인 이모는 몇 년 뒤 돌아가셨다. 어떤 친척의 중매로 사기꾼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한 이모는 결혼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돈을 요구하는 그 남자에 의해 이 여관 저 여관 끌려 다니시다 동반 자살을 택하셨다. 이 죽음은 신문에도 작게 실렸다. 지금의 조선일보 광화문 빌딩 근처에 있던 이모의 미용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마사지실까지 갖춘 긴 직사각형 모양의 이모 미용실은 꽤 유명던 것 같. 단골 중에 권력가나  재력가 사모님  많았다고 한다. 이모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때까지 이모 미용실을 자주 다녀서인지 미용실 안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중 거울 위로 죽 붙은 서양 여자들 사진들도 기억난다. 외할머니 방에 걸린  사진은 이모 미용실에서 가져온 것인데, 누우면서 올려다본 금발 여자 사진은 정말 무서웠다. 무서움과 섬뜩함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극도의 낯섦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다 얼굴은 짐멜의 말처럼 혼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 아닌가?      

마지막은 모나리자 그림이다. 2004년에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볼 수 있었다. 어김없이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모나리자 그림 앞이었다. 유리 액자 속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 그림을 가까이서 볼 수가 없었다. 너무 관람객이 많아 먼발치에서만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작았고 유리를 통해 비친 그 그림에서 아무런 아우라도 느낄 수 없던 것은 당연했다.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그 작품의 진품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벤야민은 설명한다. "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까지 포함하여 그 사물을 중심으로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개념"(「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46쪽)이다. 모나리자 그림이 세상에 나온 이후 그 그림을 보고 경탄하고 경배한 사람들의 무수한 시선들이 어려있다는 상상도 아우라를 느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각 현상으로 아우라를 못 느끼더라도 상상의 힘으로 아우라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루브르 박물관에서 난생처음 본 모나리자 그림 원본은 그냥 밋밋했다. 그래도 모나리자 그림 앞에 물려든 관람객들을 보면서 경배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의 힘은 느낄 수 있었다. 벤야민은 이미지적 사유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의 힘에 대한 벤야민의 다음 단상이 벤야민 사유의 특징을 다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작은 단서 하나는 줄 거라고 생각해서 여기 옮겨본다.      

     

"의지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표상된 이미지뿐이다. 그에 반해 단순한 말에서는 의지가 너무 지나치게 불붙어 이내 훨훨 타버릴 수 있다. 정확하게 이미지로 표상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지란 있을 수 없다."(『일방통행로』, 115쪽)     

     

추억 속에서 내가 떠올린 이미지는 주술적인 힘을 가진 이미지, 섬뜩함을 주는 이미지, 경배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였는데, 위 인용문에서 벤야민이 언급하는 이미지는 실천을 고무하는 힘을 가진 이미지이다. 정치적 혁명의 정신은 "억압받은 선조의 이미지에서 그 자양을 취한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344쪽)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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