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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pnumsa Dec 26. 2023

[함께 여는 국어 교육] 성평등 교육을 고민하다

부산국어교사모임 회지읽기소모임

2023년 10월 25일 오후 5:36 에 회지 읽기 소모임에 올린 글이다.



1.


그 학생들에게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와 건조한 어조로 대응했습니다. “방금 그 말이 혐오 표현인 것을 알죠? 그 표현을 제가 들었을 때 무척 모멸감과 수치심이 들었습니다! 지금 제게 사과하기를 바랍니다.” 해당 학생들은 ㄱ 교사에게 사과했고, 그 일은 일단락되었습니다.


-> 읽다가 가장 반가운 부분! (1사실)방금 그 말이 혐오 표현인 것을 알죠? (2감정)그 표현을 제가 들었을 때 무척 모멸감과 수치심이 들었습니다! (3본심)지금 제게 사과하기를 바랍니다. 지적하기 3단계의 모범 사례이다.



2.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의하고 판단하는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 진정한 페미니즘 수업은, 우리가 억압받고 차별받고 혐오받고 소외되어 있다, 라는 말조차도 못하는 대상을 찾아서 해방시키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페미니즘 수업에서 “여성을 보라.”라고만 말하니까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페미니즘 수업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사례를 가져오면 억압받지않는 여성이나 억업받는 남성의 사례를 가져온다. 페미니즘 수업은 이런 패턴으로 미궁에 빠지게 된다.


혐오 표현은 권력의 표현이다.


-> 이걸 이해해야 한다. 왜 그렇게 혐오 표현을 많이 쓰니? 라고 따지기보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권력이 무엇인지, 그 욕망을 분석해야 한다. 권력을 가질 수 있으면 가지면 된다. 그런데 가질 수 없을 때, 혐오를 시작한다. 일단 권력을 가졌다면, 그것을 행사하고, 확인하고 싶은 욕망 또한 있다. 이때는 혐오가 아니라 억압과 착취로 이어진다.(수많은 소수자의 범주가 있지만 자신의 권력관계와 무관한 범주에 대해서는 '혐오'하지 않는다.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소수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침범한다고 느낄 때 그리고 그것을 주동적으로 거부하거나 수용할 수 없을 때 '혐오'가 시작된다.)


혐오 표현을 쓰는 남학생/이대남은, 어떤 권력을 갖고 싶어하나? 어떤 권력을 가지지 못해서 이렇게 안달이 나 있나? 우리 내면의 나도 몰랐던 혐오들은 어쩌면 나의 권력욕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 내면의 그림자를 발견하면 소수자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높아질 것이다.



3.


피해자가 머뭇거리나 당황하면 승자로서의 권력을 만끽하며 똑같은 행동을 계속해요. 이런 반응을 무력화하는 방법이 단호함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본인에 대한 도덕적 공격이 아니고, 피해자의 당황함과 주저함이 보이지 않기에 소모적 언쟁으로 번지지 않아요. 가해행위에 대한 추후 대응이나 대책은 이후에도 가능합니다.


-> “보이기에”의 오타가 아닌지??



4.


사실상 수업에서 페미니즘을 거의 다루지 못한다는 건데, 말씀하신 수업이 의미가 있다고 봐요. 


-> 사회와 윤리 시간에는 뭐하는지? ‘민주시민교육’ 과목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5.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교실에서 공기처럼 떠도는 혐오를 알아채는 감수성이 필요해요. 교실에 붙은 ‘아동 청소년이 알아야 할 디지털 성범죄 7가지 안전 수칙’에는 모두 서술어가 ‘~하지 않습니다’로 끝나요. 모두 학생의 행동을 제한하는 표현인데, 이건 학생을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거죠. 이 속에는 여성 혐오와 나이에 따른 혐오가 작동합니다. 가까운 것에서부터 혐오 표현이 있는지 학생들과 함께 찾아보곤 해요.


-> 최승범 선생님의 수업 사례 글에는 없는 내용. 이런 수업이 필요하다.


미래엔 중학 〈국어〉 2-1의 한 단원에 〈넌 바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경우, ‘바보’라는 표현 속의 장애 혐오 가능성, ‘얼굴에 검댕 칠을 한 연탄장수 아저씨한테 쓸데없이 꾸벅 인사하는’에서는 특정 형태의 노동에 대한 혐오 가능성, ‘계집애들도 흘리지 않는 눈물을 찔끔거리는’에서는 여성 혐오 가능성 등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했다. 페미니즘 수업으로서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문학 수업이라면? <넌 바보다>라는 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 소수자 혐오의 관점에서 형편없다. 하지만 시나 소설은 항상 그런 문제가 있다. 시대와 사회가 그러한 것이며, 시인들은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의 아름다움>과 <시 속의 불편한 지점>들은 모순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의 중심 주제가 전달하는 가치와, 주변 텍스트의 차별적 의미들을 동시에 발견하는 것을 문학 수업의 가치로 삼는 것이 좋겠다. 중심 주제를 넘어서 주변 텍스트를 분석해 내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페미니즘 문학 이론을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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