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메리 유치원에서는 5월에 '동화 속 주인공'이라는 행사를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중에 등장인물 한 명이 되어 보는 행사이다. 그 인물을 왜 골랐는지를 서로 소개하고 그 인물처럼 옷을 꾸며서 무대 위에 올라가는 일종의 코스프레 행사이다. 특별한 점이라면 코스튬 자랑보다는 선생님이 아이가 책을 가지고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를 한 명 한 명 길게 길게 소개해준다. 어떤 아이는 '설명책'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 안에 스토리도 없고 등장인물도 딱히 없어서 고르기 어려웠다고 한다.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중에 한 문장을 골라 해마다 캐치프레이즈로 삼는데, 코로나 전에 본 걸로는 "동화 속 주인공들이 모두 책 밖으로 나왔다가 못 돌아가면 책 속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니?"가 기억난다. 올해에 가보니 "동화 속 주인공들만 있으면 세상에 사람들은 없어도 될 것 같아."였다.
우리 유나는 5살 때 처음으로 '동화 속 주인공'을 하게 되었는데, 동화 속의 어떤 인물로도 되고 싶지 않아서 무대에서 "김유나" 코스프레를 했다. 그때 좋아하던 책이 하필 ABC동요책이어서 뭘 고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행사에 참여했는데, 다른 집 아이들의 코스튬에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박스를 잘라 로봇을 만들고 풍선아트로 거미다리를 만들고 한땀한땀 바느질로 물고기를 만들고.. 아이디어와 솜씨에 너무 놀랐지만 승부욕이 불탔다. 6살 때 멋진 걸 만들어야지, 했으나 유나는 겨울왕국의 '엘사'를 하고 싶어했다. 엘사 옷은 도저히 만들 자신이 없어서 쿠팡에서 엘사 옷을 사서 입혀 보냈다. 유치원에서는 공주 옷 같은 거 사지 말고 부모님이 직접 만드는 게 좋다고 자꾸 잔소리를 했다.
둘째 지민이는 6살 때 처음으로 '동화 속 주인공'을 하게 되었다. 5살 때는 코로나로 쉬었기 때문이다. 지민이도 겨울왕국의 '엘사'를 하고 싶어했다. 할 수 없이 유나가 입던 엘사 옷을 입혔는데, 마침 엘사가 바다를 건너가는 장면을 골랐기에 소품으로 물의 정령을 만들어 주었다.
이대로 아쉬움을 안고 마무리하는가 싶었는데, 7살이 된 지민이는 전래동화 속 '지네처녀'를 골랐다. 천년묵은 지네가 구렁이에게 복수를 하는데 인간총각이 도와주는 이야기이다. 나는 지난 5년간의 아쉬움을 모두 담아 한 땀 한 땀 지네를 만들었다. 동화책의 삽화와는 무관하게 머릿속에 지네의 이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라, 문방구에서 산 부직포를 잘라 마디를 만들고 그 안에 신문지를 구겨 넣어 불룩하게 한 다음 스테이플러로 고정시킨 다음 실로 마디끼리 연결하는 수준이었다. 지네 머리는 안 쓰는 머리띠에 붙여서 지민이 머리에 끼우고 등을 지나 바닥에까지 끌리는 길고 긴 지네를 만들어서 행사날만을 기다렸다.
행사 당일, 길메리 유치원에 가니, 코로나로 쉬는 동안 엄마들의 솜씨가 많이 줄어들었는지 예전같이 놀라운 작품들은 없었다. 그래도 포인트를 잘 살린 성냥팔이 소녀와 귀여운 마녀들, 실제로 불이 들어오는 토끼택시, 헬륨 풍선으로 된 구름 소품을 든 리지, 비늘을 진짜로 떼어 줄 수 있는 무지개 물고기 등 볼거리는 풍성했다. 한 명 한 명 무대 위로 나올 때마다 학부모들은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오~~"
"어머, 어머!"
"아이 귀여워~"
그런데 우리 지민이가 나올 때 객석에선 환호 대신
"으어어.."
하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나는 5년만에 꿈을 이루었다.
뒷자리의 어떤 엄마가 옆구리를 쿡 지르길래 돌아보니
"저거 만드는 데 한 한 달 걸렸어요?"
하였다. 사실 하루만에 만들었는데 잘난 척하는 걸로 보일까봐 그냥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