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어교사모임 회지읽기소모임
2023년 5월 18일 오전 11:37 에 회지 읽기 소모임에 올린 글이다.
청소년문학을 굳이 규정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른 문학 중에서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나? 성인 작가들이 청소년을 '위해' 창작을 한다는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글에서는 성인들도 청소년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청소년을 '위해' 창작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성인 작가들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아 창작을 한다는 관점인 것일까? 청소년이 소설 속 사건의 주체가 되고, 청소년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내면을 묘사하면 청소년들에게 더 공감이 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성인 작가들이 청소년에 빙의하는 것일 뿐, 그 관점은 온전히 청소년의 관점은 아니다. 물론 훌륭한 작가들은 청소년보다 더 청소년스러운 시각을 글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이' 창작한 문학은 청소년문학인가? 청소년도 어른들의 로맨스를 소설로 쓴다. 물론 수준은 청소년답게 유치할 것이다. 그것은 성인문학인가?
청소년의 '삶'을 다룬 문학이 청소년 문학인가? 이것은 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시'를 살펴보자. 박성우의 청소년 시들은, 청소년의 진짜 삶과 괴리가 있다. 기형도의 <엄마 생각>은 엄마를 기다리는 청소년의 심리를 너무나 잘 드러냈지만 그것을 '청소년문학' 또는 '청소년시'라고 부르는가? <청소년문학 읽기의 가치>를 말할 때 혹시 <청소년 시>는 제외하고 <청소년 소설>의 가치만을 말하는 것일까?
현덕의 소설들은 청소년문학인가? 현덕의 소설들은 아동문학이 아닌가?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옥희가 나오니까 아동문학인가? 그렇지는 않다. <치숙>은 청소년이 나오니까 청소년문학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박완서의 <옥상의 민들레꽃>은 아동/청소년문학인가? 사랑손님이나 치숙에 비교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박완서가 <자전거 도둑>을 쓸 때 '동화'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전거 도둑>이 청소년소설로 분류될 것이다. 그런데 옥상의 민들레꽃과 자전거 도둑은 둘 다 같은 동화집에 실려 있다.
청소년문학 평론가 이전에 아동문학 평론가 집단이 존재했고, 각종 아동문학 단체는 여전히 건재하다. 청소년문학 단체는 아동과 성인 사이의 틈에서 새롭게 자리를 마련하는 중인 듯한데, 굳이 <문학평론>과 <청소년문학평론>, <문학교육>과 <청소년문학교육>, <소설읽기수업>과 <청소년소설읽기수업>을 나누는 필요성이 와닿지 않는다. 이는 이번 호의 다른 꼭지에서 SF소설 읽기를 다루는 글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지는데, <소설읽기수업>과 <SF소설읽기수업>, <소설창작수업>과 <SF소설창작수업>이 본질적으로 다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와닿는 책은 와닿는 대로 안 와닿는 책은 안 와닿는 대로 이야기나누면 되지 않는가?
미국에서는 청소년 소설을 YA(Young-Adult) 로 분류한다는데, 우리가 현재 청소년 문학, 청소년 소설으로 분류하는 많은 작품들을 만약 <준성인 문학>, <준성인 소설> 으로 이름지어 부른다면, 청소년 문학을 보는 관점이 또 달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