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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Nov 12. 2021

샤워실 불은 돌아올 줄을 모르고

샤워를 해야 하는데 불이 안 들어온다니.

진짜 여행은 여행지의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낯선 곳의 공항에서 우왕좌왕 헤매지 않고 한 번에 그곳을 빠져나갈 때의 쾌감은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감정이다.


히드로 공항에서 호텔이 위치한 얼스 코트(Earls Court) 역까지는 튜브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다행히 지하철 노선 변경이나 비행기 연착은 없었기에 예상했던 제시간에 호텔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엄마와 엄마 친구 2명 그리고 캐리어 3개를 케어하는 동시에 길도 앞장서면서 리드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날 그들의 영국 방문을 환영하듯 런던에는 보슬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인천공항보다 허름하고 볼품없어 보였던 런던 히드로 공항에 대해서 엄마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럽이라는 선진국 나라에 기대하는 무언가가 마음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으리라. 호텔이 위치한 얼스 코트(Earls Court) 역에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는 어느덧 익숙해진 광경이었지만 그 모습이 엄마에게는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었나 보다. 


"아름아. 영국이라고 해서 엄청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웬 노숙자가 역에 저렇게 앉아있네?! 여기가 중심가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야?!"


"엄마. 여기 시내에서도 중심가에 속하는 곳이야. 역 상관없이 여기도 사람 사는데라 그런지 노숙자가 여기저기 있더라고."


놀란 엄마의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덤덤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맨 처음 런던에 도착해서 마주했던 노숙자의 모습들을 나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이 어떤 지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아함과 고풍스러운 도시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곳에서 마주한 실제 런던의 세계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환상을 5초 만에 깨부수기에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역에서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화려한 호텔은 아니었지만 중심 시내에 위치해있었고 역에서 가까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4층에 위치한 우리 방을 향해 나선형 계단에 첫 발을 디뎠다. 빙글빙글 4층까지 올라가는 데, 엄마와 엄마 친구들이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어지럽다고 말하는 그들의 입에서 새로운 곳에 대한 긴장과 흥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오늘 하루 고생한 게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매 순간 롤러코스터를 타는 가이드의 기분으로 여행을 이끌어 갈 테지만, 잠시나마 가이드가 느끼는 뿌듯함이 이런 것이 아닐까하고 잠시 동화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엄마. 급하게 구한 곳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씻고 일찍 자는 걸 목표로 해요. 더 큰 방이었는데 물이 새는 바람에 여기로 옮겨와서 조금 작긴 하지만... 그럼 문 열어요."


"그래. 우리 네 명 다 같이 몸 누울 수 있는 곳이면 충분하지. 너무 부담 갖지 말라니까."


"침대가 벙커 스타일이라 조금 딱딱하긴 할 테지만 조금만 버텨줘요."


"아고. 아름이가 고생했겠네. 우리 다 같이 잘 수 있는 곳 찾는다고."


부드럽지 않은 침대에 몸을 뉘어야 하는 어른들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내가 예약한 곳이 말은 호텔이라고 했지만 외관만 그럴듯해 보이는 곳이라 걱정이었다. 그래도 고생한 나를 위해 다들 위로해주려는 마음이 느껴져서 한 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짐 풀고 있어요. 제가 마트에서 요깃거리랑 물 좀 사 올게요."


보슬비가 내리는 밖을 다시 나가면서 우산도 쓰지 않고 역에 위치한 테스코에 들려 초록색 포도, 사과, 감자칩, 물을 사서 나왔다. 혹시라도 화장실 갔다가 방에 못 들어가진 않을까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아 평소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호텔을 향해 달려갔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샤워실 앞에서


"이거 먹고 한 사람씩 씻고 밥 먹으러 나가요."


"아름아. 샤워실에 불이 안 들어온다."


"엥? 그럴 리가. 그럼 어떡하지. 내가 앞에서 서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럼 씻어 엄마."


샤워를 해야 하는데 샤워실에 불이 안 들어오다니, 어이가 없고 놀라 자빠질 뻔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침착하게 대처하자 생각했다. 리셉션에 다녀온다 해도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아 샤워실 문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핸드폰만 괜히 만지작 거리며 엄마의 샤워가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리뷰를 더 자세히 알아보고 챙겼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해 나도 적잖이 당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2021. Rumi. All Rights Reserved. 

* 글·일러스트의 저작권은 루미 작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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