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가족 #3
어린 새끼를 키우는 어미 고양이가 안쓰러웠고, 또 그 새끼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간식 던져주기가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안전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 내 행동에 대해 회의가 듭니다. 그래서 오랜 궁리와 깊은 고민 끝에, 문제는 참치캔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참치캔은 뚜껑을 여는 순간 그 냄새가 아주 강하고 비릿하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역겹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그 지독한 냄새가 주위의 배고픈 고양이들을 불러들이고 먹이 다툼이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해결책은 간식을 바꾸는 겁니다. 냄새도 덜 나고, 잘게 잘라서 멀리서 던져주기 용이한 고양이용 소시지를 간식으로 선택을 하고 오늘 처음으로 던져 줍니다. 길 건너편에서 보고 있으니 두 녀석이 내려와서 잘 먹습니다. 하지만 어미는 새끼가 먹는 옆에서 주위를 경계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부르면 날 쳐다봅니다. 두 녀석 다 모두 말입니다.
2018. 10. 23. 17시 08분
어라! 오늘은 녀석들이 평소와는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저곳은 길 옆에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농기구 등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 같은 폐건물인데, 아마도 누군가를 피해서 여기로 온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만약 쟤들이 집이 없다면 저기서 비를 피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 저 주위에 냄새나는 거름 따위를 어질어놓은 저 창고의 주인이 밉다가도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시지를 던져 주려고 다가가니 쟤들 뒤쪽에 난 개구멍 속으로 쪼르르 도망갔다가 한참 뒤에 다시 나와서 던져 놓은 소시지를 조심스럽게 주워 먹습니다. 여전히 어미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2018. 10. 24. 15시 33분
오늘은 던져 준 소시지를 새끼가 먼저 먹고 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날 경계하는 건가.
2018. 10. 25. 15시 45분
이왕 이렇게 인연을 맺었는데, 간식만 주는 것으로 그쳐서야 안될 것 같아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밥을 챙겨주리라 마음먹고 어제 구입한 사료를 빈 햇반 통에다 채워 놓습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얼룩이의 공격이 있더라도 미리 보고 도망치라고 시야가 확 트인 쪽에다 밥그릇을 두고 바람막이 벽까지 세워놓으니 그럴듯해 보입니다.
내가 작업하는 동안 녀석은 예의 제 자리에 앉아 계속 날 주시하고 있더니 자리를 비워주자 먼저 내려와서 먹고 새끼까지 먹이고는 다시 제자리로 가서 건너편에 서 있는 날 둘이서 빤히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정이 들어갑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말입니다.
2018. 10. 26. 10시 14분
2018. 10. 27. 10시 4분
오늘 저녁에 비가 온다 하길래 녀석들 밥그릇이 걱정되기도 하고, 이왕지사 여기까지 온 터에 좀 더 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창고를 뒤져보니 옛날에 폴 배변 훈련시키던 배변판과 자동차 액세서리 보관함이 있길래 식당을 증축합니다. 내가 작업하는 동안 녀석은 저기 앉아서 날 내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저렇게 조는 척합니다.
2018. 10. 27. 11시 9분
사료를 먹었나 궁금하기도 해서 1시간 뒤에 다시 와 보니 얘들은 안 보이고 얼룩이 녀석만 보입니다. 사료통에는 소시지만 먹고 사료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아마도 저 얼룩이 녀석이 먹은 것 같습니다. 또 걱정이 생깁니다. 저 녀석이 자꾸 나타나면 얘들이 겁을 먹고 사료를 못 먹을 텐데. 일단 얼룩이 녀석을 쫓아버립니다. 그런데 저 위쪽에 보니 처음 보는 녀석이 나타났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러니 얘들이 어디로 피해서 몸을 숨긴 것 같습니다. 다시 저 녀석도 쫓아버립니다.
2018. 10. 27. 15시 30분
오후에 운동하러 가면서 둘러보니 사료통은 비어 있습니다. 다행이긴 한데 과연 얘들이 먹었을지 몹시 궁금합니다. 새끼 녀석은 왜 저기에 저렇게 혼자 앉아 있는지, 쟤 모습은 항상 불쌍하기도 하고 또 귀엽습니다.
2018. 10. 28. 14시 54분 - 2018. 10. 28. 16시 2분
어미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습니다. "기순이". 이기대의 순한 암컷 고양이라고.
숲 속에 있다가도 부르는 소리가 나면 기순이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오늘은 딴날과는 다른 쪽에서 나타납니다. 사료를 부어놓는 동안 제자리에 가 앉아 있다가 내가 자리를 비우자 내려와서 먹고는 이내 숲 속으로 사라집니다. 난 이제 저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새끼를 데리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망을 볼 겁니다. 난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운동하러 갑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보니까 사료는 반 정도 남아 있습니다. 먹는 양이 얼마 되지 않나 봅니다.
2018. 10. 29. 10시 20분
오늘 아침에는 아주 특이한,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기순이가 다른 고양이랑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길모퉁이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담소를, 아니 수다를 떠는 것과 비슷한 분위기가 납니다. 그런데 난 저 녀석을 압니다. 윗동네에서 사료를 얻어먹던 녀석인데 왜 여기까지 내려왔을까, 그리고 둘은 전혀 적대적이지 않고 기순이는 저 녀석이 사료를 먹는 걸 내려다보고만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윗동네에 가보니 역시 사료통이 비어 있습니다. 급식하는 아주머니가 어디를 갔는지 물과 사료통 모두 비어 있습니다. 저 녀석은 원래 저기에 저렇게 터를 잡고 있던 녀석인데 아마 먹을 게 없어서 여기로 내려온 모양입니다.
2018. 10. 29. 15시 31분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쟤들이 다투지 않고 사료를 사이좋게 나눠먹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면 저 사료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뒹굴고 있는 화분 중에 적당한 것을 골라서 밑을 막고 오늘부터는 물도 함께 공급하기로 하고 식당을 좀 더 보강합니다. 작업하는 내내 기순이는 제 자리에 앉아 조는 시늉을 하면서 날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자리를 피해 주니 이내 내려와서 사료를 먹습니다. 좀 있다 새끼가 내려와서 먹고는 기순이가 먼저 올라가고, 새끼가 뒤이어 따라 올라가는 루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게 대한 경계는 많이 완화된듯한데 아직은 가까이 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집에 가려고 건너편에서 녀석들에게 인사를 하니 녀석들도 날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마 속으로는 감사하는 마음과 잘 가라는 인사를 내게 하고 있을 겁니다.
2018. 10. 30. 10시 7분 - 11시 13분
운동하러 가면서 부르면 기순이가 혼자 나와서 내다 보고, 집에 오면서 부르면 새끼와 함께 나와서 내다봅니다. 쟤들이 과연 처음부터 길고양이였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집고양이라 하더라도 고양이가 저렇게 친근하게 사람을 대할까 신기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아 하루에 두 번씩 녀석들을 보러 옵니다. 오후에 사료를 주러 가니 이제는 많이 익숙한 듯 별로 경계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 주니 둘이서 번갈아 가며 사료를 잘 먹습니다. 물론 기순이가 주위를 경계하는 것만큼은 조금의 빈틈도 없습니다. 먼저 내려와서 먹고는 새끼를 부릅니다. 새끼가 내려오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새끼가 먹을 동안에는 주위를 철저하게 살핍니다. 그리고 다 먹고 나면 또 둘이서 장난치며 놉니다.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것 같습니다. 기순이 말입니다.
2018. 10. 30. 15시 54분
2018. 10. 31. 10시 12분
아니 근데 이 녀석은 오늘 왜 또 여기 왔을까요. 그리고 표정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려고 이 녀석의 근거지인 윗동네로 가 보는데, 아니 이 녀석들은 또 뭡니까. 딱 봐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새끼 고양이가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가 사람도 몰라보고, 겁도 없이 등산객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나와 있습니다.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입니다. 덜컥 걱정부터 됩니다. 얘들이 어쩌려고 태어났을까. 물론 지들 뜻대로 태어난 건 아니겠지만.
오늘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바로 위를 보니 얼룩이, 기순이 모자를 위협하던 바로 그 얼룩이가 뭔가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새끼들이 지켜보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얘들은 얼룩이의 자식들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저기 노란색 경계석 너머에는 사료통이 있습니다.
내가 다가 가자 얼룩이는 이내 몸을 피해 숲 속으로 달아나고 새끼들도 본능적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덩치 크고 나이 들어 보이는 녀석이 나타나는 바람에 주변의 질서가 완전히 깨어져 버린 것 같습니다. 원래 여기가 거점이었던 회색 고양이와 얼룩이가 졸지에 지들 자리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좀 전의 얼룩이의 그 자세는 새끼들을 위해 사료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그러고 보면 얼룩이가 기순이네를 공격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얼룩이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여기 기순이네도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새끼도 기순이와 떨어져서 전전긍긍하는 것 같습니다. 감히 눈 앞에 있는 사료통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가 어떻게 수습될런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