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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Oct 30. 2018

그렇게 인연을 맺고, 이어간다(2)

길고양이 가족 #2

2018.10.21. 15시 12분


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마자 안부가 궁금하여 걔들에게 달려 가보고 싶지만, 일찍 가본들 나와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꾹 참고 평소에 만나던 시간까지 기다리는데 시간이 그렇게 더디게 갈 수가 없습니다. 

아! 어미가 나와 있습니다. 양지쪽에 앉아서 혀로 털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도 새끼는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혼자입니다. 어젯밤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불길한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녀석은 길 건너편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처럼 날 쳐다봅니다만 왠지 외롭고 허전해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등 뒤의 털을 핱고 있는데, 고양이들이 익숙하게 하는 행동이지만, 여태껏 쟤가 내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입니다.

  


2018.10.21. 16시 26분


운동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길을 건너서 걔들의 터에 가 보니 평소 깨끗이 비워져 있던 참치캔에 참치가 반 넘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정말 불행한 일이 벌어진 걸까.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어미는 미동도 않고 앉아서 날 내려다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습니다. 그런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얼마 전 읽었던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인 '한강'의 '작별'이란 단편소설에 고양이가 눈을 감는 것은 복종의 의미라는 대사가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 말을 믿고 싶어 집니다. 

오늘은 새 캔을 까지 않고, 다 못 비운 채로 남아 있는 어제의 캔을 땅바닥에 대고 탕탕 털어서 먹기 좋게 남아있던 참치 내용물을 바닥에다 뿌려두고 녀석들의 터에서 내려오니 그제야 어미가 옹벽 위에서 내려와 내게 좀 더 가까이 와서 또 날 쳐다봅니다.



근데 오늘은 아예 작정이나 한 듯이 길 건너 인도에 서 있는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서 나와 눈을 맞춥니다. 새끼를 잃고 몹시 외로워서 저러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너무도 가슴이 아파 옵니다. 근데 녀석이 바닥에 뿌려진 참치 쪽으로 가서 한 조각 먹는 듯하더니, 갑자기 이게 웬일입니까. 녀석이 쏜살같이 뛰어서 찻길 쪽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순간 너무 당황하여, 쟤가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몸이 굳어져서 망연히 서서 쳐다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런  상태인 줄도 모르고 녀석은 날 한번 빤히 쳐다보더니 유유히 찻길을 건너 내가 서 있는 인도로 올라섭니다. 그리고서는 약 2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철제 펜스에 몸을 숨기고 여전히 고양이 특유의 조심스러운 몸짓은 유지한 채 날 조금씩 따라옵니다. 또다시 너무 당황스러워졌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자 내가 비현실적인 시공간에 놓여 있는 것 같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합니다. 늦은 오후에 순간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 시간은 약 2분도 채 안될 만큼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습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내가 저를 쳐다보자, 녀석도 잠시 날 쳐다보는 그 순간, 갑자기 검은색  승용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더니만 놀라서 그러는지 총알같이 찻길로 뛰어듭니다. 아마도 길을 건너 녀석의 터로 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습니다. 나도 소리를 질렀고 검은색 오피러스도 급정거를 했습니다. 

아! 고양이들과 관계되면 왜 이리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또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들이 반복되는 걸까. 지금 이 짧은 순간 나의 초미의 관심사는 새끼의 생사 여부가 아니라 어미의 생사 여부입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길고양이가 몇 번 먹을걸 챙겨준 늙은이에게 마음을 주는,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난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피러스는 잠시 멈췄다가 제 갈길을 갔고, 어미 고양이도 무사히 제 길을 간 것 같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있고, 녀석이 몸을 숨기고 있는 숲이 서쪽이라 지는 해로 인한 역광 탓으로  숲은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 실눈을 뜨고 녀석의 흔적을 좇아봐도 헛일입니다.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는 한편으로는, 좀 전에 어미 고양이가 내게 보여줬던 그 행동들 때문에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고, 동시에 잠시 잊고 있었던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새끼 고양이의 생사 문제로 울적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뒤에서 누가 날 잡아 끄는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꾸만 길어지는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멉니다. 오늘 밤도 쉽게 지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2018.10.22. 15시 28분


새끼가 습격받은 지 이틀째인데 오늘은 과연 볼 수 있을까, 살아 있다면 말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휘파람을 부니 이내 모습을 드러내는 어미는 배가 고팠는지 내가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옹벽에서 내려와서 내가 던져 준 참치캔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맘 편히 먹으라고 자리를 피해 길 건너편에서 녀석을 주시하고 있자니, 먹지도 않고 저렇게 뭔가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바로 저 방향에서 검은 얼룩이가 숨어 있다가 새끼를 덮친 바로 그 자리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 걸 보다가 난 운동하러 올라갑니다. 나중에 사라졌던 새끼가 나타나 어미랑 함께 있는 모습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2018.10.22. 16시 39분


운동을 하고 내려오다가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려 녀석들의 터 옆쪽 숲 속을 들여다보니 아니! 저게 누굽니까.

사라졌던 새끼가 저기 저렇게 앉아 있는 게 아닙니까. 그것도 나를 응시하면서. 마치 내가 저를 찾아내기 전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던 듯한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세와 표정으로 말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었습니다. 외견상으로도 말짱합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정말로 다행한 일입니다. 아까 두고 간 참치는 좀 먹었는지 궁금해서 녀석들의 터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 녀석은 또 왜 여기 와 있는 겁니까. 같은 고양이인데도 쟤는 인상과 표정이 왜 이런 걸까요. 이 녀석 때문에 어미와 새끼가 몸을 피해 따로 흩어져 숨어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도 참치캔도 저 녀석 차지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난 화가 나서 녀석을 소리 질러 쫒아버렸습니다. 한데 도망가면서도 돌아서서 날 째려보는 저 표정,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새끼가 살아있음을 확인해서 기쁘기는 한데, 앞으로 저 녀석이 계속 나타나서 얘들을 괴롭히고, 위협하고, 먹이를 탈취할 텐데 불행히도 저 놈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 밤도 고민이 깊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새끼 걱정을 든 것이 어딥니까. 

모쪼록 앞으로도 그들에게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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