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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Oct 27. 2018

그렇게 인연을 맺고, 이어간다(1)

길고양이 가족 #1

2018.9.8. 15시 42분


내가 그 녀석들을 처음 만난 것은 운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좀 그런, 산책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미라고 하기엔 별로 덩치가 크지 않은 길고양이가 두 마리의 새끼들과 양지바른 곳에서 어울려 장난을 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아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한참을 그들을 쳐다본, 날이 조금씩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2018.10.15. 16시 50분(카메라 성능이 개선됐다는 갤노9인데도 줌으로 당기다 보니 화질이 흐립니다)


게으른 탓에 매일 다니는 길이 아닌 데다, 산책하러 가는 시간에 대중이 없어서 그런지 처음 본 그때 이후로는 걔들을 보지도 못했고, 그러다 보니 잊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에 그 어미가, 그때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혼자인 게 외롭고 불쌍해 보였고, 보이지 않는 그때의 그 새끼들이 궁금해지면서 얘들은 날이 추워지면 어디서 뭘 먹고 지낼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이렇게 그냥 지나 만 다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고양이들의 사료를 챙겨 주는 고마운 분들을 볼 때마다 항상 좋은 일을 하는 대단한 분들이라고 마음속으로 응원만 하며 행동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메가마트에 들러 고양이 먹이용 캔 6개 들이 4팩과 3kg짜리 사료 한 포대를 샀습니다.

이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2018.10.16. 15시 37분


녀석들이 출몰(?)하는 지역은 뒤쪽으로 제3함대 작전사령관 관사가 있는 숲 속인데, 그 일대는 국방부 소속이라 일반인들은 출입이 안 되는 지역입니다. 예전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는 짐작이 안되지만 직사각형의 반듯한 터에 벽돌과 시멘트로 땅을 고르고, 벽을 쌓은 흔적과 옹벽은 남아 있습니다. 거기서는 S아파트에서 이기대 공원 순환도로로 이어지는 찻길과 인도가 내려다 보입니다. 산책객들과 등산객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지만, 이맘때쯤 도토리에 눈이 먼 몰지각한 인간들을 유인할만한 숲이 없어서 굳이 거기로 올라가는 사람도 없고 해서 녀석들이 지내기는 좋은 아니, 안전한 곳 같습니다만....

어쨌든 거기다 참치캔을 두고 녀석들이 와서 먹기만 바라면서 운동을 하러 갔다가 내려오면서 보니 한 녀석이 캔에 코를 박고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잘됐다 싶어 흐뭇한 기분으로 먹고 있는 녀석을 자세히 보니 애초에 내가 먹이려던 녀석이 아닙니다. 몸집도 더 크고 생긴 것도 무섭고 야비해 보입니다. 하지만 속으로 녀석들의 아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맘 편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2018.10.17. 14시 57분                                                 2018.10.17. 16시 03분


어제의 캔은 깨끗이 비워져 있어서 오늘 새로운 참치 캔을 까서 어제 그 자리에 놓고 내려와서 길 건너편에서 주시하고 있으니 예의 그 녀석이 나타나서 아주 경계를 심하게 하며 선뜻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운동을 하러 올라가는데 과연 녀석들이 캔을 다 비울지 몹시 궁금합니다. 조금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먹이를 주면 항상 둘이 같이 나타나는 게 아니고 먼저 어미가 나타나서 주위를 둘러보고 안전한 것이 확인되면 새끼를 부릅니다. 내가 보기에 어미가 새끼를 부르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2018.10.17. 16시 05분


운동을 마치고 내려오니 어미와 새끼가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옆에 캔이 있는 걸 보니 다 먹고서 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연히 어미와 새끼 두 마리 해서 세 마리가 보일 줄 알았는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내가 얘들을 처음 본 날로부터 두 번째 보는 오늘까지 약 40일이 지났습니다. 아마도 상상하기는 싫지만 그 사이 새끼 한 마리는 죽은 것 같습니다. 사실 길고양이들에게 눈길이 가고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큰 아들 녀석으로부터 길고양이들의 평균 수명이 2,3년밖에 안된다는 말을 듣고 난 뒤부터인 것 같습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길고양이들이 많아서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사료를 챙겨 주고 있습니다. 주위의 고양이들을 보면서도 그들의 수명이 그렇게 짧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충격을 받았고, 그 후부터 자꾸 그들에게 마음이 가는 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어미와 새끼가 아주 예쁘고 귀엽게 생겼습니다. 장난감 인형 같은 새끼는 날 오랫동안 빤히 쳐다봅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알 텐데 말입니다. 겁도 없이.



2018.10.18. 15시 15분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녀석들의 터로 올라 가보니 고맙게도 캔이 깨끗이 비워져 있습니다. 새 캔을 하나 더 놔두고 운동하러 갑니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겁을 먹고 안 내려올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해 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보니 마침 두 녀석이 번갈아가며 참치 캔을 먹고 있는 게 보입니다. 어미가 먼저 먹은 다음 새끼가 먹고, 그 사이 어미는 주위를 경계하는 듯 보입니다. 날렵하게 오르는 어미와 달리 새끼는 콘크리트 옹벽을 오르는 게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게 더 우스워보이고 귀엽습니다. 어미는 계속 날 주시하고 새끼는 어슬렁어슬렁 어딘지 모를 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2018.10.18. 16시 24분


2018.10.19. 15시 19분


녀석들의 터에 도착하니 어미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던 듯 옹벽 위 제자리에 앉아서 날 조용히 주시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녀석이 경계를 많이 푸는 모습입니다. 참치캔을 두고 내려오는 나를 따라 내려옵니다. 아주 가까이 오지는 않지만 느낌 상으로는 내게 약간 친근감을 느끼는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새끼를 위해 날 더 경계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3일밖에 안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가까워졌고, 새끼는 몰라도 어미는 날 분명히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2018.10.19. 16시 28분


운동을 마치고 내려오니 어미는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날 쳐다보고 아는 체를 하고, 좀 있다가는 새끼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둘이서 함께 날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미 밥은 다 먹은 것 같습니다. 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걸 알면서도 빤히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마치 포즈를 취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즐겁고 행복합니다. 오늘.



2018.10.20. 15시 24분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 잠시 기다리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쯔쯔쯔쯔 소리를 내면 이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늘은 내가 서 있는데도 저만큼 가까이 내려와서 참치캔을 응시합니다. 자리를 피해서 길 건너편에서 보고 있으려니 역시 오늘도 새끼가 뒤이어 나오고, 어미는 새끼를 먼저 먹이고는 자신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습니다.



2018.10.20. 16시 58분


운동을 마치고 내려오니 아마도 놀고 있던 중이었는지 내가 부르는 소리에 새끼는 또 날 빤히 쳐다 보고 어미는 뭔가 주시하고 있는 듯한데, 이런! 바로 옆을 보니 이 녀석들을 노리는 놈이 숨을 죽이며 공격 자세를 취하고 엎드려 있습니다. 아마도 저 큰 놈은 얘들을 덮치려고 살금살금 기어 와서 저기 저렇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비슷한 순간에 내가 부르는 소리에 새끼는 날 쳐다보았고, 어미는 뭔가 낌새를 채고 옆을 보고 있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 큰 얼룩 고양이가 얘들을 덮쳤고 어미와 새끼는 총알처럼 옹벽 위로 뛰어올라 새끼는 왼편으로, 그리고 어미는 오른편으로 달아났습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도망치는 고양이 가족들보다 내가 더 놀라 그들이 사라진 숲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정신이 들었는데 아마도 2,3초 정도로 짧은 순간에 일어난 돌발상황이었습니다. 마치 오래된 TV프로인  '동물의 왕국'에서 숨죽이며 사냥감을 노리던 사자가 목표물을 발견하고 질주하는 바로 그 장면 그대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표적은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작은 새끼들이었던 것처럼 오늘의 포식자도 새끼를 겨냥해서 덮쳤는데, 그 둘의 덩치나 주력을 비교해봤을 때 십중팔구 새끼는 그놈에게 잡혔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습니다.



어쩌면 굶주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길고양이들에게 먹는 걸 챙겨주며, 지켜보면서 나름 흐뭇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이렇게 끝이 나는 것 같아서 슬펐고, 한편으로는 괜히 나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해서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에게 미안할 터이고, 고양이 가족들도 앞으로 계속해서 평화롭던 그들의 영토에서 침입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고양이 가족을 덮쳤던 그 검은 얼룩 고양이는 며칠 전에 첫 번째 참치캔을 먹던, 내가 혹시나 새끼 고양이의 아비일지도 모른다고 짐작을 했던 바로 그 녀석입니다. 그리고 보니 그 녀석은 안면이 있습니다. 이 자리로부터 약 30m 떨어진 숲 속에 어느 마음씨 좋은 분이 길고양이들을 위해 만든 집에서 사료를 먹고 있던걸 운동하러 지나다니면서 몇 번 봤던 녀석입니다. 사실 나도 살아있는 생명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한번 해야겠다고 속에 품어만 왔던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것도 길고양이들을 위해 마음을 써주는 그분을 우연히 보고 난 후 부터입니다.



이 녀석들은 잘 먹어서 몸이 통통합니다.

그런데 왜 이 녀석들은....

고양이 가족들, 특히 새끼 고양이의 생사 여부가 걱정이 되어서 이 밤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습니다.

시간이 빨리 흘러 아침이 어서 왔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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