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51분
어김없이 아이의 마른 목소리가 들린다.
잠에서 깬 나는 젖어 축축하고 무거운 가슴을 아이 입에 물리고는 한숨 돌린다.
수유는 아이의 탈수를 예방하고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도 있지만
밤새 차오른 가슴을 비워내기 위해서 하기도 한다.
갑자기 아이가 예상치 못하게 밤새 깨지 않고 잘 자거나 몇 시간씩 아이와 떨어져 있을 때면
젖은 그 말대로 푹 젖어있다.
젖다 못해 물을 잔뜩 집어넣은 풍선처럼 부풀어 가끔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흘러나오기도 하는데
그쯤 되면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아이가 깨주기를 바랄 수도 있다.
흔히들 밤에 힘들게 깨서 젖을 물리는 것에 대해 엄마의 희생, 절대적 사랑, 또는 말도 안 되는 숭고함으로 포장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엄마는 아이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순간이다.
물론 아이가 태어났기에 엄마의 가슴은 가슴이 아닌 젖이 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부모가 낳고 싶어 낳은 것이기에
냉정하게 말하면 아이는 부모의 필요에 의해서 태어났기에
엄마는 젖을 먹어주는 아이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젖을 먹고 바람대로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에 대해 무한한 고마움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흔히들 왜 태어났냐고 묻는다면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저 태어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면서 탄생부터 엄마의 고통을 만들고 자라면서 부모를 희생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저 부모란 감사의 대상이며 미안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며 자칫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죄의식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극심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어쩌면 왜 태어났니? 라는 질문에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태어났다는
명쾌한 답을 수많은 부모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 그것을 33살 아이를 낳아보고서야 깨달았다.
아이를 낳고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여자들의 이야기처럼 결코 드라마틱하게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가끔은 그것이 죄책감으로 돌아와 내가 과연 엄마로서 딸로서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자식들에게 희생의 보상을 강요했던 관념들이 부모가 되어보니 와장창 깨져 버리는 건 나뿐인 걸까.
간단하게 그냥 오늘은 부모의 절대적 희생 따위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졌다.
오히려 지금 엄마를 찾고 있는 아이의 울음이 고맙고
아이의 마른 목이 감사한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