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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Oct 26. 2021

정말 운명입니까

새벽에 추워서 잠을 깼다. 여지없이 열이 난다. 피부가 다 아프다. 일요일 하루 종일 앓았다. 다행스럽게도 고열은 아니었지만(코로나는 정말 골치 아프니까) 기운이 없고 어질 거려서 누워있는 수밖에 없었다. 월요일 출근이 걱정되어 10시 조금 넘어 보일러를 돌리고 이불을 둘러쓰고 누웠다. 그렇게 많은, 다양한 줄거리들의 꿈속에서 밤새 헤매어 다니다 아침에 눈을 떴더니 진통제 한 알 먹고 출근할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액체 형태의, 엄청 졸음이 오는 멀미약이 있다. 그걸 먹은 것처럼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 가끔 만나는 노부부가 있다. 딱 봐도 건강이 좋지 않다. 늙은 아내는 걸음이 많이 불편하다. 연세가 꽤 되셨을 것 같다. 옷차림은 몹시 남루하다. 늘 무표정이다. 그들은 폐지와 재활용품을 모은다. 어떤 날은 늙은 아내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종이박스를 정리하기도 한다. 늙은 남편은 조그만 수레에 산처럼 쌓아 올린 종이들을 밀고 간다. 그들이 서로를 쳐다보거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행인 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삶이 쌓아 올린 폐지처럼 위태롭다.


몸이 아픈 날 출근길에 그들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나의 아픈 몸 때문에 그들의 삶이 더 아파 보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고통이 삶의 고통과 뒤섞여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내 부모의 세계는, 그래서 내가 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계는, 가난했다.

나는 공부를 좀 했고, 대학을 갔고,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그리고 취업을 하면서 그 세계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는 공고하게 나의 배경이 되어 끊임없이 내가 번 돈을 요구했다. 부모는 늙고, 시간이 지날수록 필요로 하는 돌봄과 자원이 늘어난다. 나는 부모의 세계에서 뛰쳐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세계는 내 삶에 물감처럼 스며들어 나의 세계를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몸이 아픈 날은 평소보다 생각이 많아진다. 더구나 부정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아프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돈을 벌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부모를 부양하기 위한 자원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는 이 현실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나의 노동력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세계가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부모의 세계를 등지고 서서 이제 막 한숨 돌리고 있는 나의 세계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특히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 부와 가난은 대물림된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이상, 가난은 운명이 된다. 가난은, 부유함과 마찬가지로 운명이 되어 버리고 만다.


노부부의 느린 걸음과 거친 호흡이 거리의 쓸쓸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참혹한 세상마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놈의 운명이 너무 무거워 옴짝달싹 할 수 없다는 것은.


2018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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