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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Apr 15. 2017

Eureka 비문학 읽기 09 "밈(Meme)"

우리의 '자유의지'는 망상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의 의식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나’라고 느끼는 나는 도대체 뭘까? 내 의식도 내 몸처럼 물질로 이루어져 있을까? 내가 ‘나’라고 느끼는 것은 내 뇌 속에서 떠도는 전기 신호나 화학 물질에 불과할까? ‘나’는 물질세계와는 동떨어진, 초자연적인 공간에서 존재하며 물질세계의 몸을 뜻대로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선천적이며 탁월한 모방 능력이 있다. 한 사람의 뇌 속에 있는 밈은 행동이나 말 혹은 글 등으로 표현되고, 그것들은 모방 능력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뇌 속으로 퍼진다. 그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모방되는 밈들은 살아남고 다른 밈들은 도태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사실 모방되기 쉬운 행동이었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우리의 뇌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믿는 자유의지는 허구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밈과 유전자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


- 목차 -

1. 그럼 내가 이냐는 당신께.

2. 핵심 용어 정리.

3. 작품 해설. (나는 누구인가나는 어디에 있는가나는 무엇을 하는가?)




1. 그럼 내가 ‘뻥’이냐는 당신께.

‘밈’이라고 불리는 밈을 듣거나 본 적이 있나요?

생각이 많아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문득, 예전에 저질렀던 부끄러운 실수가 생각나 이불을 뒤집어 써본 적이 있나요? 베개를 팡팡 때려본 적 있나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이렇게 생각만 해도 이불을 뻥뻥 발로 차고 싶은 실수를 앞으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 이 실수를 통해 무언가 배웠다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실수하기 전의 ‘나’와 실수하고 난 뒤의 ‘나’는 무언가 달라졌다는 생각.

부끄러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버린 실수라면, 어쩌겠어요? 살면서 이불에 오줌 한 번 안 싸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 많은 데서 발랑 넘어져본 경험 한 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부끄러운 줄 모르고 했던 일이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부끄러운 경우가 우리 기억에 남는 거죠. 그런데 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했던 일이 어느새 우리 맘속에서 부끄러운 일이 되었을까요? ‘나’는 왜 변했을까요?

사람은 잘 변해요. 어린 시절엔 말할 것도 없지요, 하루가 다르게 생각이 바뀌니까. 저는 장래희망이 살면서 한 30번쯤 바뀌었어요. 나이가 들면 잘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고릴라나 침팬지의 행동을 바꾸는 것보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행동을 바꾸는 게 쉽지 않겠어요?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들은 참 다양해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 TV, 라디오, 노래 가사, 시나 소설, 만화처럼 말이나 글로 전달되는 것들은 우리 마음을 쉽게 들쑤셔 놓곤 해요. 때로는 밤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다 2펜스짜리 동전을 떠올리기도 하고, 별을 바라보다가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기도 하는 게 우리들, 사람이죠. 우린 뽀대 나게 교복을 수선하는 방법이나 뽐 나게 머리를 손질하는 방법, 매력적으로 보이게 화장하는 방법도 배워요. 꼭 어떻게 하는 지 말로 들을 필요는 없어요. 대충 보고 비슷하게 따라했는데 내 방법이 더 나은 경우도 많아요. 저는 학창시절에 선생님께 엉덩이 맞는 게 너무 아파서 덜 아프게 맞는 법을 베꼈어요. 웬만한 녀석들한테 돈을 뺏겼을 때는 신고하면 (진짜로) 해결된다는 걸 너무 늦게 배워서 돈도 뺏기고 막 아무 말도 못하고 막! 그랬는데, 나쁜 놈들. 그 놈들은 만만해 보이는 친구한테 교묘히 돈을 빌려 안 갚는 방법을 어딘가에서 배웠겠죠? 이런 것들이 밈이에요. 모방을 통해서 전달되는 모든 것들. 당신은 지금 이 글에서 밈이 뭔지 배웠죠? 이제 친구들한테 밈이 뭔지 대충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밈은 ‘밈’이라고 불리는 밈이에요.

태어나자마자는 거의 아무 것도 몰라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규칙 같은 것들은 성장하면서 배우죠. ‘그 규칙이란 게 참 별 것 아니로구나.’라는 생각도 배워야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의 ‘자아’라는 것은,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들과 지금까지 모방을 통해 배워온 것들의 총합이에요. 진정한 ‘나’라는 건 사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연환경, 유전자라는 환경, 우리가 모방을 통해 배워온 밈이라는 환경. 이 세 가지 환경적 요소에 의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가 결정돼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의지란 없어요. 아무도 유전자와 밈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럼 내가 ‘뻥’이냐고요? 그건 내가 생각하기에 달렸죠. 내 생각은 사실 ‘내 생각’이 아니었고, 나는 ‘내가 알던 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2. 핵심 용어 정리.


다윈주의(자연선택 원리) : 생물들이 변이를 보인다면, 그리고 생물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면, 생물체의 안녕에 도움이 되는 변이를 지닌 개체는 ‘생존 투쟁에서 목숨을 보전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자기와 같은 특징을 지닌 후손을 낳을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 : 개체의 생김새는 유전자에 의해 발현되는 여러 가지 표현형 중 몇 가지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떡갈나무가 몇 그루 없는 섬에서 떡갈나무 잎을 많이 먹게 만드는 유전자는 똑같이 떡갈나무 잎을 많이 먹는 동족들을 배고프게 만드는 유전자나 다름없다. 떡갈나무 잎을 많이 먹게 만드는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먹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자손을 많이 남긴다면, 그리고 그 자손들이 섬에 있는 떡갈나무 잎을 모조리 먹어 치운다면, 결국 떡갈나무 잎을 많이 먹게 만드는 유전자는 번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남기에 유리한 ‘개체’가 아니라, 살아남기에 유리한 ‘유전자’가 자연선택 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개체는 유전자가 효과적으로 복제하기 위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     

보편 다윈주의 : 유전자는 다양한 복제자의 가능성 중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서로 완벽하게 같지 않은(변이) 복사물들을 만드는 복제자(유전)가 있고, 복사물들 중 일부만 생존(선택)한다면, 진화는 반드시 일어난다. 어떤 형태의 복제자든지 이 세 가지 진화의 조건을 만족한다면, 반드시 진화한다.      

다산성 : 복제자는 한꺼번에 많은 수를 복제할수록 생존에 유리하다.     

충실성 : 복제가 완벽해서는 안 되지만, 기존의 성격을 대체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복제 과정이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생존에 유리하다.     

긴 수명 : 복제자는 자신을 많이 복제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살아남는 편이 유리하다.     

(Meme) : 모방을 통해 전달되는 제 2의 복제자. 모방은 완벽하지는 않지만(변이) 무언가를 복제하는 과정(유전)이다. 유용한 밈은 모방되지만 유용하지 않은 밈은 모방되지 않아서 금세 사라져버리고 만다(선택). 인간이 모방을 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밈이라는 제 2의 복제자가 탄생했고, 그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밈플렉스(Memeplex) : 밈 복합체. 한 덩어리로 뭉쳐서 함께 복제되는 밈 집합.     

셀프플렉스(Selfplex) : 자아 복합체. 이 책의 저자인 수전 블랙모어는 우리가 느끼는 ‘자아’라는 관념을 교묘하고 강력한 ‘밈플렉스들의 집합’이라 여긴다.     

밈 머신(Meme machine) : 우리는 유전자뿐만이 아니라 밈들을 위해서도 일하는 기계다.




3. 작품해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내가 ‘나’라고 느끼는 것은 도대체 뭘까? 나의 ‘자아’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철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사회학자, 아니면 생각이 많은 보통의 사람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아 왔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연구 끝에, 드디어 ‘자아’라는 관념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자아’라는 관념은 내가 받아들인 수많은 밈과 밈플렉스(Memeplex)들의 집합일 뿐이다.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밈과 유전자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밈을 이해하는 과정은 다윈주의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다윈의 자연선택 원리에 따르면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에 따라 생명의 진화가 이루어진다. 한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적자생존의 단위는 개체가 아닌 유전자로서, 살아남기에 유리한 개체가 아니라 살아남기에 유리한 유전자가 자연에 널리 퍼지게 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개체는 유전자가 효과적으로 복제하기 위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유전자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관점만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우리의 행동이 너무나 복잡해 보인다.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제 1의 복제자인 유전자 이외에 그와 상호작용하며 우리의 행동 결정짓는, (Meme)이라는 제 2의 복제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책의 저자인 수전 블랙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이고 탁월한 모방 능력이 밈을 탄생하게 만들고 퍼뜨리는 원천이라고 말한다. 보편 다윈주의 개념에 따르면, 유전자는 다양한 복제자의 가능성 중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서로 완벽하게 같지 않은 복사물들을 만드는 복제자가 있고, 그 복사물들 중에서 일부만 생존한다면, 진화는 반드시 일어난다. 모방에 의한 밈의 전파는 보편 다윈주의에서 말하는 진화에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최초로 모방 능력이 생겼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밈이 복잡하게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밈들이 대체로 자신의 다산성과 충실성을 증진시키고 수명을 길게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그 자신과 다른 밈들, 그리고 결국에는 밈이 깃들어 있는 우리의 몸과 그 몸의 구조를 설계하는 유전자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밈의 관점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극도로 파격적이다. 하지만 밈의 관점을 취하면 기존의 관점만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현상들을 굉장히 설득력 있게 설명하거나 추론할 수 있다. 밈의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첫째, 우리의 뇌는 왜 이렇게 클까?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똑똑할까? 최초의 석기가 발견된 250만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우리의 뇌는 극적으로 커졌다. 큰 뇌를 가동하는 데에 필요한 열량, 큰 뇌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열량, 큰 뇌를 가진 자식을 낳기 위해 아이가 뱃속에서 충분히 성장하기 이전에 출산해야 하는 것, 큰 뇌를 가진 자식을 낳다가 죽는 어머니도 많다는 사실. 이런 수많은 유전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처럼 큰 뇌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가 뛰어난 모방 능력을 가져야만 번식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유용한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이 최초로 나타났을 때 그의 유전자(모방하게 하는 유전자)는 집단에 쉽게 퍼졌을 것이다(원시 인류 모두 사람으로 통칭함). 곧이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방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어떤 밈을 모방하는 게 가장 좋을지, 어떤 사람을 모방하는 게 가장 좋을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뛰어난 모방 기술을 가진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고, 따라서 뛰어난 이성 모방자(모방을 잘 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이 과정이 되풀이되며 모방을 잘 하는 뇌가 자연선택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의 뇌가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커졌다(저자는 모방에 능하려면 큰 뇌가 필요하다고 가정했다.).

둘째, 우리는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지, 왜 말을 하고 어떻게 말을 하는지도 밈의 관점, 밈과 유전자의 공진화라는 관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뛰어난 인지 기능을 가진 개체가 모방 능력을 습득했고, 모방 능력이 뛰어난 개체가 번성하자 밈이 진화하기 시작했다. 언어는 단순한 몸짓보다 여러 명에게 동시에 전달하는 것에 유리했고(다산성) 조직되지 않은 울음소리보다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으며 쉽게 따라할 수 있었다(충실성). 또, 음절을 끊어서 외울 수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었다(긴 수명). 따라서 언어는 밈 선택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셋째, 저자는 유전자의 목줄에 매인 존재로 사람을 묘사하던 기존 사회생물학 모델들의 주장에 맞선다. 밈이 마치 주인에게 목줄을 채우고 끌고 가는 개처럼 개체에게 고삐를 채우고 밈 진화의 방향대로 유전자 진화를 이끌어 갈 수도 있다고 말하며, 이런 밈의 추진력에 의해 사람의 이타적 행동이 확산되는 매커니즘을 밝한다. 만약 이타적 행동이 사람들 사이에 충분히 확산된다면, 이타성 밈플렉스에 교묘히 편승하거나 실제로는 이타적이지 않지만 이타성을 가장해서 전파되는 사이비 밈들이 널리 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넷째, 문자, 인쇄술, 책, 전화, 라디오, TV, 컴퓨터, 인터넷뿐만 아니라 항공, 기차, 선박, 자동차 등의 기술이 어떻게 밈들의 생존과 진화를 가속화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쇄술의 발명은 밈의 다산성과 충실성을 큰 폭으로 증진시켰다. 인쇄술 덕분에 한꺼번에 여러 밈과 밈플렉스를 빠르게, 오류 없이 복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의 발명은 기억에 의존하던 밈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증진시켰으며, 입에서 귀로 전해지는 것에 비해 글로 전달되는 밈이 정확하다는 점에서 밈의 충실성까지도 증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IT 분야에서는 복제자를 스스로 진화시키는 방법을 프로그램에 적용하고 있다. 굉장히 많은 과정을 비약한 설명이겠지만, 이런 예를 생각해보자. 두 개의 인공지능 체스 프로그램을 무작위로 맞붙게 한 뒤, 효과적이었던 전략은 같은 상황이 나왔을 때 또 사용하고 효과가 좋지 않았던 전략은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변이와 선택). 이 과정을 컴퓨터의 빠른 연산 속도로 수백만, 수천만 번을 반복(유전)하면 인공지능 체스 프로그램은 스스로 진화를 거듭해 상당히 똑똑해져 있을 것이다. 이런 기술에 의존한 밈들을, 저자는 팀(Teme) 또는 트림(Trem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 수전 블랙모어가 말하는 밈학의 결론이다. 어떤 의견을 ‘취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 복합체(셀프플렉스: Selfplex)는 진실이거나 선하거나 아름답기 때문에 성공한 게 아니다. 그것이 우리 유전자를 돕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도 아니다. 자아 복합체는 그 속에 든 밈들이 우리를 설득하여 제 확산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우리는 밈 머신(Meme machine)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체계에 얽혀가는 밈플렉스들의 집합이다. 첫 번째 복제자인 유전자와 두 번째 복제자인 밈 이외에 무언가의 결정을 내리는 자유의지는 없다. 의식을 우리의 주관성이라고 말할 때, 자의식이 없는 의식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자아 복합체의 영향을 받지 않는 주관성에는 어떤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없다. 우리가 창조성을 말할 때, 창조성을 생성하는 배후의 힘은 복제자들의 경쟁이지 흔히 원인으로 지목되는 의식처럼 난데없이 마술적으로 등장하는 힘이 아니다. 우리의 선견지명, 예측력 또한 밈들을 통한 선택일 뿐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유전자 선택과 밈 선택이 앞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내 행동이 부도덕해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도덕성까지도 유전자와 밈이 책임질 수 있다. 유전자와 밈은 이타적으로 진화했다.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걱정의 대상인 ‘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만, 무언가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나’는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는 틀렸다. 무언가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우리가 착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나는 이런 밈학의 결론에 고무된다. 밈학의 결론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명문에 닿아 있다. 한 사람의 죄는 그 사람만의 죄가 아니다. 그 사람이 가진 유전적인 소인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환경, 그 사람이 살면서 마주한 무수한 밈들이 그 사람에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결과다. 단죄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단죄의 목적이 복수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깨닫자는 의미다. 복수로서의 단죄보다는 사회의 변화를 위한 단죄. 단죄 그 자체보다는 똑같은 죄의 반복, 재발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자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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