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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Sep 21. 2017

Eureka 비문학 읽기 12 "조선에서 보낸 하루"

조상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훌륭한 가이드와 함께하는 조선시대로의 여행
하루 동안 조선시대를 여행하는 시간여행자가 되어 지켜본 조상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상들의 문제는 곧 이 시대의 문제고 나아진 거라 믿었던 세상은 사실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흔히 과거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 말한다. 과거의 실패와 성공은 모두, 내일의 성공의 밑거름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목차 -

1. 조선시대 한양으로의 여행

2. 작품 해설 (나의 한양 여행기)


    조선시대 한양으로의 여행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저자의 가이드를 받으며 조선시대의 한양을 구경하는 시간여행자가 된다. 낯선 곳이라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의 안내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유교를 중시해서 예의를 중시했다.’라는 식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지루한 설명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다 했던가? 아무리 문화적으로 유교를 중시했다 하더라도,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람들 중에는 학업 스트레스에 지친 학생들과 반항심 넘치는 비행 청소년이 있고, 가부장 전통 따위는 우습게 여기는 당찬 여자들도 있다. 계급사회에 반기를 드는 노비들과, 그들과 뜻을 같이하며 계급사회가 부당하다고 평등을 주장하는 양반들도 있다. 백성은 아랑곳 않고 정치적 경쟁을 멈추지 않는 당파들의 모습, 주택문제, 입시문제, 부의 불평등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거지는 200년 전의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날 우리네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

    24시간이면 지구 반대편에 도달할 수 있는 시대. 바야흐로 여행의 시대인 21세기에 새로운 장소로의 여행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열대우림이나 사막, 화산지대, 고산지대처럼 평상시에 볼 수 없는 새로운 자연경관을 보기 위해 험난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의 이색적인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문명사회로 여행을 떠난다. 대체 여행이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기에 사람들은 그다지도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자연환경과 문화를 마주할 때 느껴지는 감동과 신비함을 즐기고자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의 가치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행 중에 느끼는 즐거움만큼 황홀한, 여행 후에 느끼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 즐거움의 또 다른 이름은 깨달음이다. 새로움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항상 배울 점이 있다. 좋은 것을 보면 ‘이래야 한다.’ 깨닫고 나쁜 것을 보면 ‘이러지 말아야 한다.’ 깨닫는다. 과연 우리는 조선시대의 한양을 여행하고 나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작품 해설

    - 나의 한양 여행기

    친한 친구끼리도 여행을 같이 가면 싸울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봤니?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같은 날 같은 곳을 여행하더라도 방문하고 싶은 장소가 서로 달라 다툴 때도 있고, 나는 구석구석 천천히 관광하고 싶은데 친구는 주변을 금세 훑고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보채서 다툴 때도 있지. 이번에 우리의 여행을 이끌 가이드는 관광지 구석구석을 빼놓지 않고 모두 안내하는 스타일이야.

    똑같이 사계절을 설명해도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엔 비가 많이 오며, 가을엔 단풍이 들고 겨울엔 눈이 온다.”라고 뭉뚱그려서(거시적 관점)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봄을 세밀하게(미시적 관점) 묘사하는 데만도 온 정성을 쏟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지. 저자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살아본 것처럼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는 소질을 가졌어.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진짜로 한양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되지.

나는 작가와 함께, 유레카 독자 여러분보다 조금 먼저 조선시대의 한양을 다녀왔어! 조선시대의 한양은 오늘날 서울의 모습과 많이 달랐지만,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오늘의 모습과 정말 닮기도 했어. 특히,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21세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날과 닮아 있는 거야. 


    21세기에도 신분제가 있다?

    힘든 일은 제 손으로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한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양반들과 힘든 일을 도맡으면서 천한 취급을 받는 노비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계산원들이나 재벌 대기업 회사의 하청업체 직원으로 고용되어 청소 또는 위험한 업무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어디 그뿐인가? 작년 4월, 모 피자 프랜차이즈 회장이 경비원을 폭행해 이슈가 된 사건이나 2014년 12월 모 항공사의 부사장이 마카다미아를 접시에 대접하지 않았다고 사무장을 무릎 꿇게 하고 구타한 뒤 기어이 항공기를 게이트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 ‘땅콩 회항’ 사건과 같은 재벌들의 갑질 논란은 한동안 인터넷과 뉴스, 신문을 뜨겁게 달구는 이슈였지. 21세기에 양반과 노비 같은 신분제도는 없지만, 내 생각에는 자본에 의해 보이지 않는 계급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아.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기에 금전적 능력 차이에 의한 상대적인 권력 차이를 조선시대의 신분제에 비유하는 건 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야.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 중에도 자신의 노비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 ‘비복은 나를 대신해 노동하는 자이므로 마땅히 은혜를 앞세우고 위엄을 뒤로해야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라는 율곡 선생의 말씀에 따라 대부분의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노비를 제 식구처럼 먹이고 입히고 돌보았거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개개인의 부도덕함이 물론 일차적인 문제겠지만, 그 부도덕함이 폭력이나 협박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계급에 따른 차별이 없는 평등 사회를 구현해야 하지 않을까? 신분제를 폐지한 것처럼 말이야!

    조선시대 노비들은 양반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라는 수레가 양반의 힘으로 굴러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의 수능제도, 과거시험.

    나는 우리나라 입시제도가 너무 가혹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 우리가 받을 평생 연봉의 수준이 스무 살 남짓에 대부분 결정지어져 버리잖아. ‘언어, 수리, 외국어, 사회탐구 혹은 과학탐구’식으로 우리가 공부해야 할 과목과 범위가 모두 미리 정해져 있어. 정답이 정해진 수많은 문제들보다 본래 더 중요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들’은 시험에 나오지 않아. 정해진 틀 안에서 벗어나 보고자 발버둥 치면 ‘고졸’이라는 낙인이 찍혀 취업 시장에서 불리해 지기 십상이지. 사실 대학 따위 나올 필요 없는 직장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아무튼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수능 때까지 한없이 긴 외길을 달리고 있는 거야.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시대의 학도들도 우리와 비슷한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었어. 과거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해야만 했거든. 그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삶 같은 건 살 수 없었어. 관직에 오르는 것 이외의 일은 양반가의 자제가 하기에 미천한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지. 행여 양반이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에 사채업이나 상업에 손을 대더라도, 스스로 앞에 나서지 않고 노비를 내세워 돈을 주고받았을 정도라고 하니까. 학당 유생들의 목표는 오로지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과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집에서는 독선생(개인과외 선생)을 따로 두어 선행학습을 시키기도 했으며 학당에서는 북치는 소리와 노비의 구령에 맞추어 규칙적이고 엄격한 단체생활을 해야만 했어. 대부분의 유생들이 지나친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고, 젊은 혈기에 폭력과 반항을 일삼는 비행 청소년들도 있다는 점까지 오늘날과 똑같더라.

    천편일률적인 과거시험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줄 세우는 것이 불합리하듯이, 모두가 똑같은 과목을 공부하고 모두가 똑같은 대답을 하기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입시제도도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여성들을 착취하는 가부장제.

    호주제가 폐지된 건 2005년이야. 호주제는 쉽게 말하면 집안의 가장(=호주)을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출생, 혼인, 사망을 기록하는 제도인데,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제도였어. 한 집안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버지 호적에 아들로서 기재되다가 결혼과 함께 자신이 독립된 호주가 되어 아버지의 족보를 이었어. 행여 혼인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어머니가 호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 가족인 아들이 호주를 맡아 족보의 중심이 되지. 반면, 딸이 태어났다면? 딸은 결혼과 동시에 낳아주신 부모님 가족의 족보에서 사라지게 돼. 남편의 호적에 편입되는 거지. 호주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여성은 독립된 인격으로 존재할 수 없었어. 여성은 ‘아버지의 딸’ 혹은 ‘남편의 처’, ‘아들의 엄마’로서만 존재했던 거야. 요즘도 우리 이름의 성은 보통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지?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야.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남자가 바깥일에 집중할 수 있게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고등교육을 받는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인데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지. 일하는 남성은 육아와 출산을 눈치 보지 않는데 일하는 여성은 육아와 출산을 눈치 봐야 하고, 회식에 똑같이 늦게까지 남아 술을 진탕 마셔도 남자는 ‘사회생활을 열심히 한다.’라는 소리를 듣고 여자는 ‘조신하지 못하다.’라는 소리를 들어. 유리천장이라는 표현을 들어봤니?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일정 지위 이상으로 승진할 수는 없는 현실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빗대어 표현하는 거야.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여성차별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어. 남편이 첩을 들인다고 질투하면 ‘칠거지악’이라고 여인들을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고 해. 바깥일은 남자들의 일이라고 하여, 여자들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어도 과거시험을 치러 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어. 당대의 어머니들은 딸에게, 음식을 잘 하고 바느질을 잘 하며(여공에 능하며), 남편이 출세하도록 내조하고(여자는 출세‘시키는’ 존재지 출세‘하는’ 존재가 아니야),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잘 키우면서 규방에 꽁꽁 숨어 지내는 삶이야말로 여인들이 추구해야 할 속 편한 삶이라고 가르쳤어. 여인은 그저 말이나 행동이 얌전하고 우아해야 한다고 가르쳤지. 여인들은 결혼하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빼고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 집에서도 손님이 방문하는 사랑채에는 오지 못하고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머물렀지.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싶어도 남편이 있는 사랑채로 직접 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안채에 와주기를 기다려야만 했어. 열일곱에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된 주인공이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외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장원급제시킨 이야기나 부인이 남편을 따라 젊은 나이에 자결하자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워 줬다는 이야기 따위가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열녀’에 대한 이야기들이야. 여기서 끝이 아니야. 조선시대에는 혼인하는 딸에게 ‘출가외인(시집간 딸은 친정 사람이 아니고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 되어 남의 집안 귀신이 될 것을 강조했고, 따라서 여자들은 혼인을 한 뒤에는 친정 부모님 제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어.

    물론 여성의 권리가 조선시대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1세기에 여성해방운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걸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닐까?     


    옛것에서 배우기.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봤지? 옛것을 익힘으로서 새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옛것을 익힌다는 말은 전통을 무조건 따르라는 의미가 아니야. 과거에서 배울 점은 배우되, 잘못한 점이 있다면 제대로 반성해서 다시는 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거지. 좋은 것을 보면 ‘이래야 한다.’ 깨닫고 나쁜 것을 보면 ‘이러지 말아야 한다.’ 깨달으면,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야.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그 당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에서 엄청나게 반인륜적이지. 자본주의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 또한 그렇지 않을까? 부유함의 정도, 가난함의 정도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돼. 우리는 21세기의 갑질 논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5개 국어에 능통한 동시통역사가 꿈인 사람이 수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은 다 다른데, 왜 모두 똑같은 시험을 보고 하나의 줄에 서야만 할까?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과 판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왜 똑같은 시험을 봐야 할까? 유교적 가르침과 문장력에 대한 시험만으로 모든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과거시험이 후져 보이는 것과 똑같이, 수능시험이 후져 보이면 이상한 걸까?

    여성을 차별하던 법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성을 차별하지 말자는 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어. 여성으로 하여금 바깥일을 못하게 하는 경구들은 사라졌지만, 그 뿌리 깊은 고정관념은 아직도 남아 이 시대의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조선 여행에서 이런 것들을 느꼈어. 유레카 독자 여러분이 조선의 한양을 여행한다면, 과연 무엇을 깨닫고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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