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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뇌리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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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May 07. 2018

뇌리정돈(Braingement)_ 01

「레이디 버드(2018), 그레타 거윅」

스포일러 주의

"전 출마가 취미예요. 떨어져도 상관 없어요."


# Scene 1


크리스틴 이라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지어준 새로운 이름, 레이디 버드. 나고 자란 고향을 벗어나 훌쩍 떠나고픈-새처럼 날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번지르르한 집에 살고 싶은 레이디 버드의 취미는 "좋은 집 구경하기." 동부의 유명한 학교들 중 하나에 진학하고 싶다는 딸에게 달리는 차 안에서 현실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악담만 퍼붓는 엄마. 엄마의 악담을 참다못한 레이디 버드는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린다. 

첫 번째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키스한 날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탄성을 내지르는 레이디 버드.
그와 별을 보고 누워서 "내 가슴 만져도 돼. (You can touch my boobs.)"라고 말하는 레이디 버드.
엄마에게 "처음 섹스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해? (When do you think is a normal time to have sex?)"라고 묻는 레이디 버드.
두 번째 남자친구와 침대 위에 누워서 "난 섹스 할 준비 됐어. (I'm ready to have sex.)"라고 말하는 레이디 버드.
낙태가 부도덕한 행위라고 설교하는 성모학교 교수에게 "단지 추하다고 해서 그것이 부도덕한 건 아니에요. (Just because something looks ugly doesn't mean that it's morally wrong.)", "생리중인 제 질을 가까이서 찍는다면, 보기에는 꽤 불편하겠지만 그게 잘못된 건 아니에요. (If you took up-close shots of my vagina when I'm on my period, it'd look pretty disturbing, but that doesn't make it wrong.)", "만약 교수님의 어머님이 낙태했다면, 우리가 여기 앉아 이 멍청한 강연을 듣고 있지 않아도 됐겠죠! (Listen, if your mother had had the abortion, we wouldn't have to sit through this stupid assembly!)"라고 말해 정학당하는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 살아가기 보다는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 부러진 팔

# Scene 2


쾌락주의를 설파한 에피쿠로스는, 만약 우리가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갈수록 더 강도 높은 쾌락을 원하게 되어 그것이 오히려 고통과 근심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정신적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의 상태(아타락시아; Ataraxia)를 지향했는데, 낮아진 쾌락의 역치만큼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쾌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을 누리기 위해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절제하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캘리포니아의 쾌락주의를 말하는 자는 새크라멘토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 봐야 한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연애를 시작할 땐 천국의 문이 열리기라도 한 듯 들떴다가, 번번이 실망하는 레이디 버드.
그토록 기대하던 섹스를 막상 해보니, 섹스보다는 애무만 하는 게 더 낫다는 레이디 버드.
그토록 갈망하던 뉴욕에 가고 나니 고루하고 지겹게 느껴지던 성경학교와 어머니의 잔소리, 촌스럽게 느껴지던 고향의 풍경이 생각나 감상에 젖는 레이디 버드.

어쩌면 행복은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 술에 떡이 돼 응급실에 실려간 크리스틴. 병원을 나와 성당으로 간다.

# Opinion 1


타지의 삶, 유명한 학교, 번지르르한 집을 당당하게 원하는 레이디 버드의 모습에서 숨김없는 솔직함과 사회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함, 그리고 자신을 억누르고 속박하는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용감함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로이 욕망을 누리고 싶은 개인(레이디 버드)'과 '부유함이 자유로운 욕망의 전제조건이 돼버린 세속적인 사회(어머니의 악담)' 사이의 대립구도는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은 세속적 성공에 있는가,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가?     


영화는 두 의견 중 어느 한 쪽의 올바름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영화가 싱겁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레이디 버드가 세속적 성공을 거두기를 바랐거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기를 바란 사람이라면 특히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싱거움이야말로 이 영화가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옳고 그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다툼은 인간 본성의 선악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행복에 대한 견해 차이에 의해 비롯될 때가 더 많다는 사실, 때에 따라선 억압적인 사랑도 사랑이 되고 사랑이 섞인 억압도 폭력이 된다는 무섭고도 따뜻한 진실 말이다.     


성숙이란 무엇인가? 현실의 벽을 깨닫는 것도 성숙이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 또한 성숙이다. 성숙이란 갈팡질팡 하면서 자신만의 적당함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군가 나서서 지도의 어느 한 곳에 압정을 꽂고 '여기가 가장 적당한 지점'이라 선포할 수는 없다. 적당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며, 세상은 멈춰 있지 않고 좌우로 요동치기 때문이다. 성숙이란, 피할 수 없는 의견 대립과 다툼 안에 조용히 숨어 있는 소중함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레이디 버드의 행동에서 올바름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레이디 버드는 성장하고 있을 뿐이니까. 바람에 잘 흔들리는 사람도, 굳세게 맞서는 사람도 사실은 모두 번민하며 성숙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 Opinion 2


레이디 버드는 자유롭고 적극적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말한다. 분하면 소리 지르고 강자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다. 사회의 통념에 저항하며 방법을 찾고 뜻을 이룬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한층 더 성숙한다. 레이디 버드 같은 여자는 주위에 얼마든 있지만(있어도 되지만) 세상은 이런 모습을 '남성적'이라고 불러왔다(그래서 많이 없다). 세상은 레이디 버드처럼 행동하지 않고, 조신하게 순결을 지키는 수동적인 여자만을(이들이 잘못된 건 아니다) '여성스럽다고' 칭송한다(그래서 많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이런 세태를 대사로 꼬집는 영화가 아니다. 그런 대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영화는 그저 10대의 성장 이야기일 뿐이고 그 10대가 여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레이디 버드」는 여성주의적인 영화가 아닌가?      


문장(Text)은 맥락(Context)과 함께 읽어야 한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가 상영되는 사회,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영화라는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장르를 불문하고, 세상의 모순과 차별, 억압에 투쟁하는 주인공은 대부분 남자였다. 하다못해 저항이 아닌 폭력과 반항조차 극중에선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레이디 버드」는 굉장히 전복적으로 읽힐 수밖에. 텍스트로서의 「레이디 버드」는 여성주의적이지 않지만, 컨텍스트 속에서의 「레이디 버드」는 여성주의적이다.     


그동안 '여성주의 그거 말은 좋은데 너무 극단적이고 과격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레이디 버드」를 추천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여성주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계기가 될 테니까. 굳이 여성주의를 비판하려면, 우린 좀 더 섬세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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