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년보다 훨씬 무더운 여름이었어요. 유독 인간만 더위를 민감하게 느끼는 건 아닙니다. 성인 엄지손가락 크기에 육박할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미국바퀴벌레의 출몰 지역이 몇 년 전부터 점점 북상하고 있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원래 남부지방에서만 주로 나타나던 미국바퀴벌레가 이젠 서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해졌지요.
지어진 지 30년은 족히 된 제 집도 바퀴벌레 안전 구역은 아니더라고요. 폭탄 같은 장마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직전인 7월 중순께, 저는 제 침실 벽에 ‘뙇!!!’하고 붙어있던 엄지발가락만 한 미국바퀴벌레를 발견했지요. 그는 마치 다가오는 장마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당당한 풍채를 뽐내고 있었죠. 그 모습이 너무 징그럽게 느껴져서 비명을 내지르며 잡았던 게 기억나요.
그런데 저도 그렇고, 사람들은 어쩌다 지금처럼 바퀴벌레를 싫어하게 됐을까요? 그에 대해 우리가 주로 내놓는 대답은 ‘바퀴벌레는 음식물쓰레기를 먹거나 하수구처럼 더러운 곳에 살아서 더럽고, 질병을 옮긴다.’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말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요?
더러움의 과학적 정의
과학적으로 어떤 명제의 참/거짓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그 명제를 이루는 핵심 용어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하는 법이죠. 따라서 ‘바퀴벌레는 더럽다.’라는 명제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더러움’이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럽다고 느낄까요? 흙이나 먼지에서부터 쓰레기, 썩은 음식, 침, 오줌, 똥, 파리와 쥐, 바퀴벌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더러움을 느끼는 대상이 주로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아무 동물이나 상상해 봅시다. 저는 지금 머릿속에 참새를 떠올렸는데, 거미나 지렁이, 아니면 침팬지나 인간을 떠올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자, 이제 그 동물 중에 상한 음식을 먹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꼬질이’ 무리와 상한 음식을 쳐다만 봐도 기겁하는 ‘깔끔이’ 무리가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야생에서, 두 무리 중 더 생존에 유리한 쪽은 어디일까요? 아무래도 ‘깔끔이’ 무리겠지요?
현생 인류야 워낙 잘 먹고, 잘 마시고 안전한 곳에 살며 위급할 땐 좋은 약도 사용할 수 있으니, 배탈이나 설사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간신히 먹이와 물, 잠잘 곳과 짝짓기 상대를 찾아야 살아남고 후손을 남길 수 있는, 인간을 제외한 야생동물 대부분에겐 그렇지 않아요. 상한 음식을 먹었다가 배탈이 나면 설사병으로 체액을 급격히 잃어서 죽을 수도 있고, 기력이 약해진 틈에 포식자에게 사냥당할 수도 있고,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져 굶어 죽을 수도 있죠. 그러니 야생에서 살아남는 데 있어서 상한 음식을 더럽다고 느끼는 능력은 아주 핵심적이었을 거예요. 진화 과정에서 그 능력을 지니지 못한 개체는 모두 도태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 만큼 말이죠.
그러니 아마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더러움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거예요. 냄새 맡기 싫고,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쳐다보기도 싫어서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거나 자리를 피하고 싶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겠죠. ‘더러움’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전에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게 되기 전에도, 더러움에 대한 감정은 존재했을 거예요. 우리 조상의, 조상의, …, 조상의, 조상의 조상, 유인원이 되기 전의 조상에게도 더러움에 대한 원초적인 수준의 감정은 존재했을 겁니다. 몸에 안 좋은 것을 감지하고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본능은 생존에 워낙 중요한 능력이니까요.
바퀴벌레도 더러움을 느낄까?
만약 더러움이 해로움에 대한 회피 반응으로서 진화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면, 바퀴벌레도 더러움을 느낄까요? 바퀴벌레에게 질문을 할 수는 없으니, 바퀴벌레의 행동을 보고 유추할 수밖에 없을 텐데, 한 가지 흥미로운 관찰 결과가 있더라고요.
새가 부리로 자기 깃털을 다듬고 고양이가 혀로 자기 털을 다듬듯이, 동물이 제 몸을 스스로 다듬는 행위를 그루밍(Grooming)이라고 하거든요? 바퀴벌레도 자기 몸에 있는 잔가시를 스스로 다듬으며 그루밍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뭔지 아세요? 사람이 손으로 바퀴벌레를 만지고 나면 바퀴벌레는 평소보다 훨씬 열심히, 아주 격렬하게 그루밍을 한다는 거 있죠? 바퀴벌레를 만진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열심히, 아주 격렬하게 손을 씻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휴지를 한 뭉텅이 두껍게 뭉쳐서 바퀴벌레를 잡은 다음에 물과 비누로 손을 씻고, 또 씻고, 소독까지 할 만큼, 그렇게까지 바퀴벌레가 더러울까요?
과도한 깨끗함은 인간을 죽인다.
위생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면 안 됩니다. 병원에서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기 시작한 이래로 환자 수와 사망자 수가 현저히 감소했다는 통계도 있고, 요리할 때 식재료와 조리도구를 깨끗이 씻고 청결히 유지하는 게 감염병 예방에 아주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요. 코로나19 대유행 때 마스크를 제외한 가장 주요한 감염병 대처 방법이 ‘기침 예절’과 ‘손 씻기’였다는 사실 역시 다들 기억하고 계실 테고요.
그러나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위생 및 청결에 대한 열정이 과하다는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어요. 위생과 청결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더러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과도하게 불안해하는 현상을 일컫는 ‘위생 강박’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니죠. 문제는 그런 현상이 개인적인 수준을 벗어나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커피 얼룩이 진 옷, 흙 묻은 신발, 들기름 묻은 손, 파리가 잠시 앉았던 숟가락, 이런 것들이 인간에게 끔찍하고 재난적인 수준의 질병을 일으킬 만큼 더러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린 이런 것들을 너무나 쉽게 더럽다고 말하며 버려 버리고,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독약이나 다름없는 화학약품을 과도하게 들이붓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게 살충제와 소독약, 세제를 판매하는 대기업들의 공포 마케팅, 그 기업들의 로비에 양심을 팔아치운 가짜 과학자들의 기만적이고 조작된 연구 결과, 자본에 잠식된 언론과 정부만의 잘못일까요? 어쩌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약간의 이기심, 순수함과 무결함, 완벽함에 대한 욕망이 지금의 세태를 만든 게 아닐까요?
20세기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저서 <침묵의 봄>에서 인간이 사용한 살충제와 제초제, 소독약 등 화학약품이 인간(특히 어린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것은 물론,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흙이 묻고 벌레 먹은 채소, 그릇에 묻어 있는 약간의 기름기, 옷에 남아 있는 약간의 얼룩, 바퀴벌레가 밟고 지나간 자리, 이처럼 인간들이 더럽다고 말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러운 것은 사실 인간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화학약품일지도 모릅니다. 독이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인간이 뿌려놓은 먹이를 먹다가 목숨을 잃고 마는 불쌍한 바퀴벌레들처럼 인간들 역시 자신이 사용하는 제품에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속 사용하다가 서서히 병들고 죽어가게 되는 건 아닐까요?
더러움의 상대성 이론
생태계를 이루는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약간 지저분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바퀴벌레에게 인간은 거의 지옥에서 태어난 파멸의 악마 수준으로 더럽고 불결한 존재죠. 이렇듯 더러움은 상대적인 겁니다. 아마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게 투표권을 주고 지구상의 생명체 중 가장 더러운 종을 다수결로 투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자명합니다. 먹기 위해 죽이는 것도 아닌데 수많은 생명을 병들게 하고, 괴롭히고, 이유도 없이 죽이는 인간들…. 지구에서 가장 더러운 생물종은 단연 인간일 거예요.
* 본 글은 인문교양 잡지 월간 <유레카> 490호(2024년 9월호)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브런치 발행 과정에서 원고를 편집하였기에 <유레카>에 실린 글과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