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류 Aug 17. 2024

인간, 자연을 모방하다

[유레카] 쉽게 읽는 과학

인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방 능력을 지녔어요. 그래서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말과 행동의 본질을 재빠르게 해석하고 그것을 응용하지요. 때로 인간은 자연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어요. 그리고 그 지식을 다른 인간을 착취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데 사용하죠. 정말 부끄러운 일이에요.


인간은 모방의 동물     


아기들은 아주 어린 시기부터 다른 사람(특히 부모)의 행동이나 표정, 말을 따라 한다고 해요. 이처럼 인간은 아주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모방 능력을 지니고 있지요. 인간의 여러 능력 중에서도 특히 모방 능력만큼은 다른 어떤 동물(유전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조차)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해요. 그래서일까요? 서울대학교 교수인 장대익은 2012년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인간을 ‘호모 리플리쿠스(Homo replicus; 모방하는 자)’라고 표현했지요.


요즘은 인터넷용어나 신조어 격으로 많이 사용되는 밈(meme)이라는 용어는 사실 1976년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사용된 과학용어예요. 고대 그리스어로 '모방된 것'을 의미하던 미메메(μίμημα, 영어로 mimeme)를 유전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진(gene)과 비슷한 형태로 줄여서 탄생시킨 단어지요.


밈은 ‘색종이로 학을 접는 방법’이나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 갈 때는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믿음’처럼 말이나 행동에 대한 모방 가능한 지침이나 정보 따위를 말해요. 생식(生殖)을 통해 복제되고 전달되는 유전자와 달리 밈은 ‘모방’을 통해 복제되고 전달되죠. 복제 과정에서 변이가 발생해 유전자가 진화하듯이 밈도 복제 과정에서 변이가 일어나고, 따라서 진화해요.


요즘 사람들이 ‘열 받네’ 대신 ‘킹 받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게 된 것도 밈 진화의 예로 볼 수 있어요. ‘킹 받네’ 밈은 본래 화난다는 의미의 ‘열 받네’ 밈에서 진화했는데 어느덧 ‘열 받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킹 받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이 현상은 자연에서 살던 늑대가 인간과 공존하며 개로 진화했는데 오늘날 늑대는 사라져가고 개는 번성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사람들이 숟가락으로 병뚜껑을 따는 이유     


대학 때 친구랑 벤치에서 마시려고 맥주를 샀는데 병따개가 없어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요. 벤치 모서리에다 병뚜껑을 건 다음 ‘팍!’하고 치면 병뚜껑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제 생각이 짧았죠. 그런 능력을 발휘하기에 제 손기술이 너무 부족했어요. 그러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배웠던, 숟가락으로 병따개 따는 기술이 떠올랐죠.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왼손과 병뚜껑에 지렛대처럼 걸고, 왼손으로 병을 꽉 쥔 채 오른손으로 나뭇가지에 힘을 ‘빡!’ 줬어요. ‘치이익, 뻥!’ 소리와 함께 병뚜껑이 열렸고, 저흰 즐겁고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었죠.


이렇듯 병따개 없이 병뚜껑을 따는 능력은 병따개가 없을 때는 아주 유용한 능력이에요.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니, 병따개를 옆에 두고도 숟가락으로 병뚜껑을 따는 사람이 꽤 많더라고요? 부끄럽지만 저도 그러던 시절이 있었고요. 잘못하면 손도 아프고 힘도 많이 드는데, 우린 굳이 왜 이러는 걸까요?


과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합니다. 만약 병따개 대신 숟가락으로 병뚜껑을 따는 제 모습을 본 어떤 심리학자가 봤다면, 이런 가설을 세웠을지도 몰라요. ‘관심받고 싶어서 그러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 사랑을 덜 받았을지도 몰라….’ 어떤 진화생물학자는 제 행동을 ‘짝짓기 상대에게 매력을 어필하기 위한 수컷의 매력 발산 행동’으로 해석할지도 모르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문화인류학자는 팔짱을 낀 채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지도 몰라요. ‘현생인류 사이에서는 저런 문화가 유행하나? 매우 흥미롭군….’


한편, 밈을 연구하는 학문인 밈학은 인간의 행동을 밈의 관점에서 설명해요. 인간의 마음이나 의도처럼, 인간적인 관점을 가진 우리가 보통 우선시하는 것들을 밈학에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지요. 아마 제 모습을 본 밈학자는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병따개 대신 숟가락으로 병뚜껑을 따다니. 아주 비효율적이지만 그래서 더 눈길이 가고, 심지어 때로는 유용하겠어. 모방하고 싶게 만드는 밈이군. 저 밈은 젓가락이나 나뭇가지 같은 제3의 도구를 이용해서 병뚜껑을 따는, 또 다른 밈으로 진화할지도 몰라. 머지 않아 스마트폰으로 병뚜껑 따는 밈을 보게 될지도?’


모방의 힘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아마 인간의 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밈학은 물론 다른 이론들도 마찬가지죠. 인간의 행동에는 인간의 심리와 유전자, 문화나 환경 같은 다양한 요인이 모두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아마 우린 영원히 인간 행동의 기원을 완벽하게 분석할 수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인간의 행동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제시했던 여러 가지 이론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모든 이론은 저마다의 오류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조금씩 보탬이 되고 있다고 믿어요. 아마 밈학도 그러리라 생각하고요.


나뭇가지로 병뚜껑을 딴 이야기를 하면서 모방 능력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설명하고 싶었어요. 만약 먼 옛날 인류의 조상이 나뭇가지끼리 빠르게 문질러서 불을 만들고 과일이나 조개의 딱딱한 껍데기를 돌로 깨는 기술을 발명했을 때, 인류에게 모방 능력이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세요. 아무도 기술을 모방할 수 없다는 것은, 기술자 한 명이 죽으면 그 사람이 가졌던 모든 기술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아마 그랬다면 달리기도 느리고 힘도 약하며 추위에도 약한 인간이 자연에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예요.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죠. 인간은 타고난 모방 능력을 바탕으로 대화하는 기술이나 별자리를 보는 기술,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 지식, 종교, 문화 등 수많은 밈을 퍼뜨리고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번성하게 됐지요. 한 마디로 모방은 약하디약한 인간이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었던 셈이에요.


인간, 말 없는 자연에서 배우다     


우리에겐 찍찍이나 벨크로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훅앤루프 패스너(Hook-and-loop fastener)는 쉽게 붙였다 뗐다 할 수 있고 내구성도 강해서 어린이 신발에서부터 군복까지 아주 다양하게 쓰이고 있어요. 찍찍이는 스위스의 전기 기술자였던 조르주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이 발명했는데, 자꾸 귀찮게 옷에 달라붙는 도꼬마리 열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대요. 이렇게 자연 속 생물에서 영감을 모방해 발명한 기술을 ‘생체모방기술(Biomimicry, Biomimetrics)’이라고 하지요.


새의 깃털이나 소금쟁이의 발, 연잎의 발수성(물을 흡수하지 않고 밀어내는 성질)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된 발수성 코팅은 물체가 물에 젖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오염까지 방지할 수 있어 산업 전반에 널리 활용되고 있어요.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도 튼튼한 거미줄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된 고강도 섬유는 방탄복, 선박, 타이어 등의 제조에 활용되지요. 어디에나 잘 달라붙으면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도마뱀붙이(leopard gecko; 레오파드 게코)의 발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된 게코 테이프(gecko tape)는 접착력이 매우 우수하며 쉽게 붙였다 떼어냈다 할 수 있다고 해요.


이외에도 식물의 광합성을 응용해 태양광 발전의 효율을 높인다든지, 모기의 마취기술이나 독사가 독을 주입할 때 사용하는 독니의 원리를 응용해 통증 없는 주사를 개발한다든지, 생체모방기술의 예는 정말 수도 없이 많고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그러나 자연의 존재 방식 그대로를 밈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밈이라면 모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설명 없이 인간이 자연을 모방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데, 인간은 신기하게도 말 없는 자연에서 어떤 본질을 포착해 깨달음을 얻어요. 그리고 그것을 ‘물에 젖지 않는 새로운 소재를 만드는 기술’과 ‘잘 붙고 잘 떨어지는 새로운 소재를 만드는 기술’처럼 모방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지요. 그러니 밈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볼 수 있어요. 인간은 모방의 전문가인 동시에, 새로운 밈 발명의 전문가인 셈이죠.


모방은 혁신의 어머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표현 들어보셨죠? 사람은 실패의 경험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 배움이 피와 살이 되어 성공을 이끈다는 말이지요. 저는 기술 혁신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모방 없는 혁신은 불가능하다고 믿죠. 병뚜껑 따기 기술의 혁신이 병따개에서 숟가락, 숟가락에서 나뭇가지로 이어졌듯이 모든 혁신은 99퍼센트의 모방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기술 혁신도 99퍼센트는 남의 몫이라고 생각하지요. 새로운 약 성분에 특허를 내서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돈만 아는 저질들을 제가 싫어하는 이유예요.


2022년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수학자, 허준이 교수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집단지성이라는 게 무서워서 한 사람이 막히더라도 ‘내가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막혔어. 나는 더는 여기에서 나아가지 못하겠어’라고 옆 사람에게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옆 사람이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 구성원 중에 어느 한 명이 굉장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 얘기를 그냥 서로에게 들려줬다가 되돌려받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굉장히 신비하게도 원래는 없는 정보량이 굉장히 불어나 어느 순간에 새로운 정보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를 보며 허준이 교수의 겸손함에 감탄하는 한편, 이러한 인식이 아주 소중하다고 생각했어요. 조금만 알아도 난 체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다른 사람의 성취도 존중할 줄 아는, 이렇게 빛나는 인식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요.


몇십 년 동안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던 문제를 혼자만의 힘으로 풀어내는 사람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일이에요. 작지만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조금씩 모이고, 그 작은 혁신들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상을 주며 혁신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칭송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느 한 혁신가가 ‘특허’라는 이름 아래 성취에 대한 과도한 보상을 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많은 경우에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공존하는 자연을 모방해야 할 때     


인간은 자연에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앞서 살펴봤듯이, 그건 인간의 지식도 마찬가지지요. 자연에서 힌트를 얻어 모방 가능한 새로운 기술을 발명해내는 인간의 탁월한 능력조차도, 자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무의미했을 거예요. 자연 없이 인간은 존재조차 할 수 없다는 더 중요한 사실은 차치해 두더라도 말이죠.


저는 인간이 자연에서 공생, 변화, 순환의 중요성을 배울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과 뾰족한 이빨만 보고 배울 게 아니라,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연과 공생하는 길을 택한 호랑이를 보고 배우자는 거죠. 모든 풀을 뜯어 먹는 초식동물도 모든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동물도, 지나친 먹성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게 되어 있어요. 자연에서 먹이는, 결코 무한정 얻을 수 없으니까요.


생명의 신비가 몇억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균형에 있어요. 오늘날 인간이 그 무엇보다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배가 부르면 그만 먹는다는 균형감각일지도 모르겠네요. 날카로운 발톱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도끼로 세상의 모든 나무와 풀을 베어 버리고 맹수의 이빨을 닮은 창으로 모든 동물을 죽여 버리면 결국 세상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예요.


발톱이나 이빨, 번개처럼 에너지를 소비하는 자연의 기술 대신 햇빛과 물, 바람처럼 에너지를 창조하는 자연의 기술을 우리가 더 많이 배우고 확산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니까요.


* 본 글은 인문교양 잡지 월간 <유레카> 472호(2023년 3월호)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브런치 발행 과정에서 원고를 편집하였기에 <유레카>에 실린 글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곳을 클릭해 다양한 인문교양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월간 유레카를 구독해보세요!

작가의 이전글 인류가 초래한 여섯 번째 대멸종 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