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수 Apr 30. 2022

시간을 박제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정확성과 유일함이라는 기술

"정확하다는 건 희미하지 않다는 말이죠. 희미하지 않다는 건 금방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이고요. 잊혀진다는 건 시간이 지났다는 말이니 정확하다는 것은, 시간을 멈춰세운단 의미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정확한 문장을 엮어 작품을 어떤 시간성 속에 박제시킵니다."

얼마 전 사내 월간 책 소개 코너에 적은 문장이다. 강남역에 위치한 회사를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사원들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마케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문학을 통해서. 신형철 평론가의 '느낌의 공동체'를 소개했고, 그의 다른 글들도 추천했다. 글 속의 비평과 그로 인해 틈이 생긴 작품들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구현하는 정확한 문장 때문이었다.


정확한 문장과 쉼표, 단어의 선택과 배열을 통해 기억의 구조를 완성하게 될 때, 우린 더이상 가느다란 느낌의 골목에 세워진 그 건축을 못 본 척할 수 없게 된다. 에둘러 가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높이 올라가 그 건축으로부터 새로운 시야를 확보하거나, 다시 내려와 그 건축을 어쨌든 지나가야 한다. 한 번 생겨난 사유는 좀처럼 침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처와 다르며, 희미해지거나 변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억과 다르다.


그러나 반드시 정확해야 한다. 문장이 비뚫거나 단어가 기울면 당장 건축을 세울 수 있더라도 금시에 무너지고 만다. 그러면 폐허가 된 그 자리를 느낌은 지나가길 꺼려하고 심하게는 그 동네를 아니 그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 동네를 벗어난 사람의 사유에 다시 그 동네에 신빙성 있는 건축을 세우고, 느낌을 들이는 일이 문학이 하는 일이라 믿었다. 그러니까 첨단의 도시를 신설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첨단을 재축하는 작업이다.


과거는 일단 과거가 된 순간 수많은 가능성 속에 놓여진다.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노란 옷을 즐겨입기도 했지만, 초록 신발을 좋아하기도 했고, 초록신발에 어울리는 파란 옷을 선호하기도 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면, 다시 이 문장을 읽게 되는 나. 이처럼 과거는 늘 '지금'의 자리에서 새롭게 규정되며, 그러므로 미래에 관여한다. 가령 나는 어제 수박을 먹었으니 오늘은 또 다른 과일을 먹을 거야 라고 했을 때, 내가 오늘 저녁 먹게 될 과일이 수박이 아니게 된 연유는 '수박을 먹었다'고 과거를 정의한 '지금'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언제나 결과의 자리에서 사유한다면, 시간을 박제시키는 기술이란 정확성과 유일함이 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확해지려는 시도(정신)를 통해 유일함(육체)에 도달하는 노력이다. 이러한 작업이 문학을 통해 가능한 까닭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공감하고 카타르시스(일체감)을 느끼는 동안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엄연히 공감할 수 없는 것임(객체감)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자각된 객체감으로 인해 작품에 몰입하기 보단, 작품을 읽는 나 자신에게 몰입하게 되고, 결국 나의 유일성을 향해 그리고 정확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문학을 통해 정확성과 유일성을 기른다는 건 신형철이 <몰락의 에티카> 어느 구간에선가 말한(아마, 뉴웨이브에 대한 오독을 정정하는 글이었던 것 같다.) '차이에 대한 감각'을 익힌다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별하다보면 무엇이 옳은지를 보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느낌의 건축이 서서히 완성되고, 사유의 도시는 웅장해진다. 그 도시에서 생산되지 않는 감각(크리에이티브)은 없고, 그 도시를 거치지 않은 물자(솔루션)은 없으니 그것은 완전한 마케팅의 성채가 된다.


결론. 불경처럼 중얼거리고(표현) 강조한(내용) 감이 있지만 다시 정리를 해보자. 시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우리는 늘 오른쪽 끝지점에서 왼쪽의 시간을 사유하는데, 그 사유 자체가 시간의 오른쪽 끝 지점에 새롭게 기입된다.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린 늘 결과의 자리에서 원인을 생각하게 되며, 그로 인해 시간은 생각, 느낌, 사유로 상대적 규모를 갖는다. 당신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할수록 시간의 보폭은 깊어지고, 사유의 정원은 넓어진다.


이게 마케팅이랑 무슨 상관일까.

마케팅은 시장 조작이다. 시장은 거대한 바다 내지는 하늘이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떻게 한낱 인간이 해류와 기류를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간단하다. 정확한 지점에 유일하게 서 있으면 된다. 그러면 해류와 기류를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끊임없이 변하는 해류와 기류에, 무너지지 않는 이름을 지어줄 순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안에 서 있는 모두의 심중에 영원히 남는 이름을 내놓는 것, 그것이 나는 마케팅이라고 이해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