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wHereUs Jan 20. 2022

들어본 책을 읽게 된 이유

고전을, 책을 다시 펴볼 수 있었던 계기들

한국에서 언니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이전엔 먹을 것이나 옷이 들어있어야 기뻤는데, 지근거리에 한인마트가 천지인 지금 이 곳으로 이사온 후로는 한국책이 더 반갑다. 페이스북에 인증샷을 올렸다. 책을 잔뜩 올린 이 사진에 올라온 댓글에 대댓글을 달다가 궁금해 진 것이 있다. 


어떤 소설을 두고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셨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국문과 출신이라서 물어보셨다는데 나는 국어학을 공부했기에 대학원에서 문학은, 말뭉치에 입력된 문장 구조만 보고 사전 만들 때 예문으로 뽑아서만 사용했다.

문학 비전공자의 문학에 대한 한마디. 괄호는 대댓글 이후 덧붙인 생각들.

------------

저는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요구하는 서사가 존재하는 작품이니까요. (그리고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넓게 문학이라는 장르로 생각해보면, 이 책이 5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길이 읽힐 책, 이른바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두 소설 모두 무료 버젼(근 1/3있더군요)  읽으며  떠올랐던 소설이 불편한 편의점이었던 것 같아요. 
82년생 김지영이 나왔을 때도 비슷한 의견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작품성을 논하는 것도, 이런 작품들이 깊지 않다는 의견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고 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문단의 평론가들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심오해야 소설이다 혹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한 것이 소설이라는 장르의 존재 이유다, 라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

나 때 수능은 언어영역이 불같은 난이도였다. 당시 109점을 맞았다고 기억하는데 Y대 국문과를 나오신 고 3담임 선생님이, '나보다 잘 봤네!'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입시를 잘 치른 건 아니다. 


최근 고전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올리는 포스팅에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댓글이 있다. 어렸을 적, 혹은 젊을 적 읽었던 책이라는 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찔려온다. 나는 그 작품들을 읽어 본 기억이 없다. 


익히 들어 유명한 고전 소설 몇 권, 문학 전집, 소설집, 등등의 책들이 언니의 책장에 꽂혀있었던 건 기억난다. 한국단편소설집이라는 책을 펴들고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다가 그 책을 덮고 더이상 책장을 넘기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하느라 바빴다기엔 나의 내신 성적은 초라하다. 그렇다고 잘 노는 학생도 아니었고 나는 친구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문학작품을, 고전을 읽지 않은 이유는 뭘까?


수능 공부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해진 시간 내에 문제의 답을 찾아내는 기술을 평가하는 시험이 수능이다. 학력고사 세대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단편 지식을 암기해서는 풀 수 없는,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를 내겠다고 한 것이 수능 제도의 출발점이라 알고 있다. 


지문이 길고 어렵다는 말이 자꾸 언급되는데, 현 교육 상황에서 똑같운 조건하에 전국의 같은 학년 학생들을 촘촘히 줄을 세우기 위해서 이런 형태의 시험을 대체 할 수 있는 시험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입시에 대한 논설을 쓰려던 건 아니니 다시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본다. 어떤 영역의 문제도 많이 풀어 본 사람을 당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수능 출제에 들어갔던 선생님들은 차출되지 않는 해엔 참고서나 문제집 제작에 참여하시더라. 암튼, 읽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공식이 머릿 속에 없으면, 풀이 방법을 떠올리지 않으면 풀 수 없는 수리/과학 중 물리 과목의 문제집을 푸는 것보다 언어/외국어 영역 문제집을 푸는 것을 좋아했다. 


똑똑한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던 내게 다양한 지문에서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잡다한 지식들을 수집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영어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지만 언어 영역은 정답여부에 대해, 혹운 답지의 해설이 의미하는게 뭔지 궁금해서 뻔질나게 교무실을 들락거렸다. 덕분에 교사용 문제집을 공짜로 얻은 적도 많다. 시중에 나온 언어/외국어 문제집운 다 풀었다고 자부한다. 문제는, 지문을 읽고 사고를 펼치고 텍스트의 맛을 음미하는 것은 수능 점수를 올리는 것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는 거다. 


고2, 고3 담임 선생님 모두 문학 선생님이셨는데 때로는 내가 들고 간 매력적인 오답을 소거해야 할 이유가 마땅치 않아 곤란한 표정을 지으신 적도 많았다. 그런 경우의 답은 '이정도로 애매하면 출제될 수 없거나 출제 돼도 복수정답 되니 걱정 말고 너의 감을 믿으라'는 거였다. 현실적 조언이었고 감사했지만 교육에 대해 공부하고 나니 내가 선생님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뒤늦은 후회감이 들기도 한다.

과외나 공부방 봉사를 할 때 아이들에게 나도 이렇게 가르쳤다. 시험지를 받으면 지문에 딸린 문제 갯수를 확인하고 문제가 무엇을 묻는지 확인한 후 지문에서 어디를 어떻게 읽을지 캐치하라고 말이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문제 읽고 지문 읽는데 답이 안 뽑히면 그 지문에 딸린 문제는 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능 문제를 살펴보지 않은지 오래되어 가물가물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언어영역의 단골 문제들을 떠올려본다. 


문학 작품의 경우 단어나 표현에 밑줄 그은 후 해당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문학작품의 일부를 싣고 이 작품의 화자가 다른 지문을 읽는다면, 어떻게 말하겠는가? 
X 인물이 할 법한 생각은?


글쓰기 모임에서 에세이 쓰기를 배우며 연습했던 '친절함'은 소설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내려놔야 할 부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너무 뻔하게, 추측이 가능한 친절한 서술, 평면적인 인물로는 소설의 서사 구성이 불가능하다고 이해했던 것 같다. 에세이도 TMI로 쓰는 내게 소설은 영원히 도전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르로 여겨졌다.

언급된 두 작품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들, 친구의 동생, 직장 동료의 자매일 법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아직 두 작품을 완독하지 못했다는 걸 전제하고, 사건 배경도 있을법한, 들어본 듯한 이야기들이다.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 온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나의 학창 시절의 독서 멈춤에 대한 변명을 이어본다. 지문으로 제시된 짧은 조각들에서 흥미가 생겨 찾아본 책들은 대부분 두꺼웠다. 그리고 뭘 찾아야 하는지 주어지지 않은 채로 그 두꺼운 책들을 다 읽어낼 시간도, 멘탈 에너지도 없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수능 문제 풀듯 이해하려는 나의 독서 태도도 독서를 지속하기 어렵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사실 그런 이유로 근 20년을 책을, 특히나 문학작품을 멀리했다. 책을 펴드는 것 조차 어렵게 한 일이라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책을 읽어내기에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전은, 반쯤은 팬심으로 읽기 시작했다. 나머지 반절은 들어봤고 무슨 내용인지, 어떤 상황에 인용되는지도 알지만 읽어본 적 없는, 나의 독서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학창시절을 핑계대기엔, 나의 인생의 시간은 너무 많이 흘렀다. 


들어본 책들을 읽다보니 읽었다고 생각한 책들에서 중요한 포인트들에 대한 나의 기억이 완전 틀렸다는걸 깨달았다. 유일하게 읽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데미안>의 화자가 데미안이 아니라 싱클레어였다는 걸, 여러 번 읽고 선물까지 했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클로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친구와 함께한다는 걸, 그야말로 읽었다면 몰라서는 안될 것 같은 핵심 요소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시 읽게된 작품들은 반가웠다. 책에 대한 열망을 되살려주기도 했다. 


이전의 나는, 모르면 모른다고, 안 읽었으면 안 읽었다고, 기억이 안나면 안난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안 읽고 읽은 척 하는데 점점 익숙해졌다. 이 생각의 벽을 깰 수 있었던 건 미국 대학원에서 만난 교수님들 덕분이었다. 물론 내가 만난 교수님들이 미국 교육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철학 교수님은 국가론, 민주주의와 교육, 에밀, 프레이리 등의 교육 고전을 들고오셔서 저자의 아이디어를 현재의 교실 장면, 교육 환경 해석에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물었다

역사 교수님은 매 수업 마지막에 우리들에게 다음 학기 이 책을 같은 과목을 들을 학생들에게 추천할 것인지를 물었다.


더 놀라운 것은 교수님들이 석사나부랭이인 나에게 수업에서 다루는 책에 나온 저자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여부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다는거다. 신선했다.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방식대로 책을 읽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언어의 장벽과 함께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이 생긴 기분이었다. 덧붙여 매 수업 교수님들은 우리와 동일한 읽기 과제를 읽어오셨고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있으면 잠시 수업을 멈추고 자신이 들고 있는 책을 다시 펼쳐 읽었던 부분으로 돌아가거나 강의 노트를 확인한 후 대답을 했다. 같은 텍스트를 여러번 읽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잊어버리면 다시 읽으면 된다고 했다. 때마다 다른 것을 느끼는 것이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가르쳤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유의미한 독서를 할 수 있는 정도보다 더 많은 양의 리스트가 부과 된다는 것? 그래서 안 읽고 읽은 척 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이런 고민을 토로하자 한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도저히 시간이 안되면, 서문과 결론만이라도 읽으라고, 그리고 목자로 다시 돌아가 논의 혹은 레포트 작성에 필요한 챕터들을 골라서 읽으라고 말이다. 논문의 경우도 다 읽을 시간이 없으면 초록은 무조건 읽고, 도입과 결론 순으로 읽으라고 했다. 


책 읽는 것이 아직은 많은 외부자극이 필요한 행위에 머물러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영역으로 넘어왔고 하루의 시간으로도, 멘탈 에너지도, 돈도 상당히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은 삶의 한  부분이다. 훈련이 부족하다는 변명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독서기록을 쌓을 수 있었으면 한다.



미국 대학원 얘기는 여러차례 했는데 가끔 오해를 사기도 한다. 대화가 한국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마는 쪽으로 흘러갈 때면 아쉬웠다. 페이스 북에 윗 글을 올리니 한 교수님이 내 글을 읽으며 본인의 유학시절을 떠올려다고 하셨다. 본인도 학생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수업을 하고 계시다고 했다. 내가 참석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이끄는 나의 글쓰기 싸부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 본인의 이해, 세간의 평가를 모두 던져준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늘 그가 주도하는 독서모임에는 열일을 제쳐두고 참석하게 된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작년에 그가 주도하는 돗서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읽었던 고전이 열 권이 넘는 것 같아. 읽고나서 관심이 뻗어가 읽은 책까지 합치면 스무 권 쯤 읽은 것 같다. 


교육시스템, 입시제도만 탓하기엔 시간도, 환경도 많이 변했다. 내 글에 댓글을 달아준 교수님 말고도, 이 시스템 안에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독서경험을 하게 해주려 노력하는 교육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핑계도 변명도 내려놓고 진짜 책을 의미있데 읽어가는 독서경험을 나의 삶에 자리잡게 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