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독서모임
지금, 여기의 순간을 충분히 누리자고 생각하고 또 다짐하고서도 그렇게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사랑의 단상> 독서모임을 위해 아령 들듯 책을 읽어나갔다. 읽다가 펼쳐 든 <사랑의 기술>때문이었을까? <A Lover's discourse>가 아니라, 내가 아는 언어, 한국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성실히 읽었지만, 맛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사랑의 기술>이 잘 구워진 식빵 같다면 <사랑의 단상>은 생쌀을, 그것도 불리지도 않은 현미를 억지로 씹고 있는 느낌이랄까? 몸에 좋다니까, 먹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일이 있어 중간에 나와야 했지만 정말 1분 1초라도 더 듣고 싶었다. 오늘 나눴던 많은 얘기 중에 나를 뒤흔든 말은 이것이었다.
바르트의 유아기적 욕구 찬양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과 어린이를 찬양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야말로 규칙 과잉화에 빠져있는 어린아이처럼 바르트를 읽고 있었던 건 아닐까? 철 좀 들라고, 성숙해지라고 일갈하는 내가 오히려 미성숙한 태도로 이 책을 읽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은, 혼자서는 다 읽어내지 못할 책이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이렇게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는 책이라는 걸 다시 한번 다짐해야겠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가 지켜내고 싶은 순수한 무언가, 내가 잃었을,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감정, 사랑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 세발자국쯤 움직여보려고 한다.
마음 챙김 워크숍을 할 때마다 강조하는,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마음을 왜, 특정한 작품들에게는 갖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미워하는 마음은 다른 단면들을 보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고 했던 그의 말을 떠올려본다. 화를 낼만큼 낸 것 같다. 이제는 남은 시간을 새로운 감정으로 채워야 할 때인 것 같다.
마지막 모임에서는, 새로운 위치에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의 단상>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