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멘탈까진 아니더라도 가죽 멘탈을 득템했다
사건은 신촌기차역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길을 터보자는 마음에 찍어두었던 작은 빵집을 들렀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버스를 기다리느라 나도 모르게 등 뒤의 벽에 살짝 기대 카톡을 확인하던 중,
난데없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내게 윽박지르는 중년 남성이 옆으로 훅 들어왔다.
워낙 쉽게 놀라는 나는 육성으로 "으악 깜짝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생각하면 잘 한 일인 것 같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 다행히도 내게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잔뜩 분에 차 씩씩거리는 그자는 있는 힘을 다해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낯선 이의 상식 밖의 무례함을 정말 오랜만에 겪는 순간이었다.
잠시 시선을 돌려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내가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은 신촌기차역 맞은편의 작은 김밥집의 유리문이었고,
내가 그자의 소중한 가게 유리문(!)에 기대고 있던 것이 문제이자 크나큰 잘못이었던 것이다.
본인의 길을 막아서 화가 어련히 났나 보다 생각한 나는 죄송하다고 말한 뒤 바로 앞의 버스정류장으로 몸을 옮겼고,
그자는 소중한 그의 작은 김밥집 유리문을 따고 들어갔다.
유리벽에 기대는 것이 그렇게 천벌 받을 잘못인가 하는 오기가 생겨 버스정류장에 몸을 기댔다.
공교롭게도 정류장의 벽은 유리였다!
김밥집 유리창 너머로 그런 내 모습을 목격한 그자는 분명 한 번 더 혼자 씩씩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2차전이 시작되었다.
화가 덜 풀린 그 중년 남성은 굳이 내게 다시 걸어와(꽤나 엄청난 정성이다) 내 면전에다 대고 개념이 없다고 몇 번이고 소리치며 화를 토했다.
너무 어이가 없고 놀란 나는 그 사람의 돌아버린 눈(깔)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눈빛을 보니 어련히 화가 쌓여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의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생각에 일말의 안쓰러움도 들더라.
어쨌든 나도 사람인지라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당해야 하는 이 상황에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지.
대강 실- 웃으며 (그리고 살짝 기분 상한 목소리로) "아 예 죄송합니다~~"라고 대응했다.
당시에는 그자의 분노에 최소한으로 반응하려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내 실없는 대응에 그자는 나를 몇 초간 노려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 짧고도 긴 순간 동안 나는 속으로 이 자가 나를 한대 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하며 떨고 있었다.
내 대답에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하며 내가 택한 반응에도 살짝 후회를 했다.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자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개념 없는 인간 정도로 남게 된 것이 이 사건의 결말이다.
예전 같으면 뒤돌아서 혼자 눈물 찔끔했을 사건을, 어제의 나는 돌아서 집으로 가는 길에 힙합 노래를 틀고 분노를 삭였다.
또 카카오 맵에서 김밥집 리뷰를 찾아보며 그 할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캐냈고, 실제로 나만 이 자를 겪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 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또 내가 겪은 이 작지만 큰 일을 혼자 글로만 담아두면 혹시나 나중에 고름이 맺힐까 봐,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통화하며 이 일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전화기를 붙잡고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힘든 일은 있을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액땜이라고 생각하자고,
많은 사람들은 본인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자고,
이런 경우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강철 멘탈은 못되더라도 가죽 멘탈은 이제 되는 것 같다는 말로 그날의 수다는 막을 내렸다.
긁힌 자국이 남겠지만 흐르는 시간의 흔적을 몸에 안고 부드럽게 익어가는 가죽 멘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요즘 말로 오히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