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은 언제나 전쟁이지만, 오늘은 더욱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나는 늦게 일어났고, 남편도 늦잠을 잤으며, 아이도 늦게 일어났다. 셋이 집을 나서야 하는 마지노선은 7시 50분. 7시 30분에 셋 중 제일 먼저 눈을 뜬 나는 3분 만에 샤워를 하고 아이 입에 빵을 욱여넣었다. 8시에 피난민같은 행색으로 집을 나섰으니 나는 화장은커녕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터였다.
회사에 출근해 어떻게, 너무 날 것을 드러낸 얼굴을 좀 가려보고자 파우치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놓고왔구나.....얼굴은 어째어째 넘어가려도 반절밖에 없는 눈썹은 어떻게든 채워 하나를 만들어줘야겠는데. 눈으로 책상을 훑는데, 입사할 때 받은 문구세트에 노랑연필이 보였다. 옆 동료에게 칼을 빌려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연필을 가장 많이 썼던 때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고3, 재수 시절이었다. 4B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데생도 했는데 그 연필이 너무 비싸 아끼고 아껴썼었다. 한 자루에 900원씩이었는데, 한 다스를 사면 조금 싼데도 나는 엄마한테 '연필사게 만 원만 주세요'라고 말하기 미안해 꼭 한 자루를 900원 내고 샀었다-이렇게 말하니 진짜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입시생인 것 같지만, 그땐 엄마가 미대입시를 반대하던 때라 재료비를 달라 하기가 좀 많이 그랬다. IMF로 집안 형편도 안 좋았고. 나중에 남대문시장에 가 미술 재료를 훨씬 싸게 살 수 있다는 걸 알 때까지 나는 연필을 한 자루씩 사서 곱게 깎아 썼다. 4B는 필기용 HB보다 흑연이 무르고 진해 금방금방 닳았다. 10cm 이하로 남으면 볼펜 깍지에 껴서 썼다. (이거 진짜 무슨 6.25 전후세대 얘기냐...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뒤늦게 입시미술학원에 등록한 나는 말수가 없고 그저 앉아 그림만 그리는 학생이라 선생님들이 '돌부처'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4시간 내내 앉아서 말없이 그림만 그리는 건 나에게도 곤욕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 힘들면 일어나 화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가서 연필을 깎았다. 딱히 말붙일 친구도 없었던 때인데 농땡이를 피우려니 명분이 없어서였다. 스케치나 연필데생을 하다 연필을 깎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수채화 채색을 하다가도 지겨워지면 구석에 가서 연필을 깎았다. 채색 도중 일어나 쓰지도 않는 연필을 깎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점을 교묘히 이용해 연필을 아주 열심히, 정교하게 깎았다. 나는 지금도 연필 깎는 걸 좋아하는데, 커터칼로 연필을 깎을 때 나무를 벗겨내며 나는 서걱서걱 소리와 칼날이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질감을 좋아한다. 나무는 물론, 흑연까지 날카롭게 다듬어 '그림 같은' 연필로 다 깎아놓고 보면 완성도 높은 하나의 조각작품을 만든 듯 뿌듯하다. 연필이란 무릇, 한도끝도 없이 가늘게만 깎는다고 잘 깎는 게 아니다. 적당히 날렵하면서도 흑연을 감싼 나무에는 손의 근력과 필압을 지탱할 만한 최소한의 굵기가 확보돼야 한다. 그래야 쥐기에 좋고, 쓰기에도 편하다.방망이 깎던 노인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쌀을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일갈하던 다듬이 방망이 장인이 연필을 깎았더라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연필을 깎던 그리운 풍경도 갖고 있다. 동생은 미취학, 언니와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저녁밥을 먹고 밥상을 물리고 나면 아빠는 언니와 나에게 필통을 가져오라 하셨다. 쇠로 된 길다란 필통에 연필 네다섯 자루, 지우개 하나 넣고 다니던 때였다. 아빠는 우리 자매가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는 채로 열 자루 남짓 연필을 칼로 한 자루씩 멋지게 깎아주셨다. 우리는 그 열 자루가 날렵해지고, 뾰족해지는 걸 숨소리 죽이며 지켜보곤 했다. 아빤 손재주가 좋아 뭐든 잘 만지고 만들고 고치셨는데, 연필을 정말 예술로 깎아주셨다. 내가 3~4학년이 됐을 무렵, 엄마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기차모양 연필깎이를 사주실 때까지 아빠는 매일 저녁 우리들의 연필을 깎아주셨다. 다음날 등교해 날카로워진 연필로 공책에 글씨를 쓰던 느낌이 참 좋았다. 하루종일 나는 다섯 자루의 연필 심지가 무뎌지도록 글씨를 썼다. 잘 벼려진 연필 심지를 종이에 댔을 때 느낌, 서걱거리는 소리와 글씨 쓸 땐 느껴지는 긴장감. 아... 키보드가 모든 텍스트를 생산하는 세상이 됐지만 나는 아직도 연필을 사랑한다. 그리고 매일 저녁 지치지 않고 딸들의 연필을 깎아주셨던 그 시절의 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