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
일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에 가깝다.
그 일상이 고되든 혹은 넉넉하든 때론 일상은 비켜설 필요가 있다. 비켜설 시간을 누린다는 것만으로 우린 충분히 축복받고 있다는 증거된다. 이번 여행기는 그 증거에 대한 기록이다.
부산을 찾으면 제일 먼저 내게 주는 선물이 복국이다.
오랜 운전에 지친 내 몸에 주는 선물이다. 맑은 국물은 멍해진 정신을 바로 세운다. 까치복국이 국산이라 이 메뉴를 주문했다. 맑은국물이지만 속깊은 맛이다. 한그릇 들이키면 '복이 내게로 온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맹독을 갖고 있는 독이 이렇게 맛나다니 말이다. 독이 득이 되는 경지다.
2019년7월19일, 때는 비오는 금요일 아침이었다.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광안시장을 찾았다. 9시30분에 오픈인데, 9시를 조금 넘어 매장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사람들이 7~8명 줄을 서있었다. 겨우 김밥 먹으러 왔는데, 가게 오픈전에 줄을 서다니. 순간 새로운 아이폰을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선다는 사람들이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고지김밥과 김치말이김밥을 구입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온 호텔에서 늦은 아침으로 박고지김밥을 먹었다. 한줄에 2,000원이라는 착한가격이 무색하게 그 맛은 열배에 가깝다. 튼실한 속살은 명품백화점 김밥에 버금가고, 씹히는 속재료의 품질은 최고였다. 겨우 김밥인데라는 나의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편견을 깨는 품질, 편견에 저항하는 태도, 편견에 맞서는 우직함. 김밥한줄이 존경스러웠다.
대창이 아이스크림과 동격이더라. 이를 쓰지 않아도 입에서 녹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다. 가격도 1인분에 만원정도이니 이것도 감동적이다. 부산의 명물이라고 해서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비교적 일찍 찾아간 식당에는 오후 5시가 안되었는데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마음 한편으로는 '별거 있겠어' 라는 생각이었는데 한입 베어문 대창은 내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나중에 내가 부산을 찾는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해성막창 때문일 것이다. 고기가 맛나니 직원들도 예뻐보인다.
2019년 7월 20일 부산은 엄청 비가 내린다. 비오는날 JM 커피점에 와있다. 비와 바람과 커피 그리고 글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나는 글을 쓰고, 아이도 글을 쓰고 아내는 책을 읽고 있다. 이외에 모든 것은 정지다. 삶이 정지되는 공간은 집중력을 발휘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가를 떠난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을 나서면 삶의 바깥 것들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모모라 에티오피아' 커피를 마셨다. 살짝 신맛이 난다. 어쩌면 이 커피맛은 아프리카의 땀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커피농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땀이 숙성된 것. 그래서 한모금 들이키면 겸허해지는 맛이다. 세상 모든 신맛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앞에 기도해야한다.
더엘리는 신세계센텀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음료수를 먹는다. 내돈주고 내가 먹는데도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자고로 장사는 이렇게 해야한다. 나 역시 내돈주고 사먹은 것은 '흑당밀크티'다. 기존에 먹었던 것들과는 격이 다르다. 흑당은 그 맛이 풍부하고, 타피오카는 쫄깃하다. 품질이 좋으니 사람들이 줄을 설수 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성실하게 준비했을까? 성실함이 좋은 결과를 만들었고, 좋은 결과는 일종의 능력에 가깝다. 매사 정성을 다해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당연한 진리를 더알리는 말하고 있는듯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밥을 좋아한다. 경주에도 그 유명한 '교리김밥'이 있다. 우리나라 삼대 명품김밥이라고도 한다. 이집의 주메뉴는 잔치국수와 교리김밥 두종류 뿐이다. 밀려드는 주문통에 정신없이 김밥과 국수를 들이켰다. 계란지단이 풍성했다. 김밥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화로움에 관심이 많은 민족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부산의 박고지김밥과는 다른느낌이다. 뭐랄까? 좀더 자본의 냄새가 강하다. 매장 덕지덕지 붙여놓은 TV출연 광고가 오히려 신뢰를 더 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과유불급이다. 고수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도 빛이나기 마련인데, 스스로를 너무 포장하는 모습이나 가격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오늘 한번이면 족한 맛이다.
여기는 가히 커피공장이다. 공장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모든것이 공장스러운 분위기다. 와이파이도 없고, 스타벅스에서 흔하게 제공하는 전원 공급도 되지 않는다. 투박하지만 그 안에 정제된 세련미가 테라로사를 정의하고 있다. 이게 곧 여기의 브랜드다. 매장 여기저기서 나는 테라로사라고 말하고 있지만, 딱 여기까지다.
여행은 끝났다.
부산은 생각보다 배부른 곳이었다. 사람들은 분주했고, 태풍 덕분에 비도 충분히 맞았다. 아이러니하게 서울로 돌아오니 부산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매번 언젠가 부산에 가겠지. 부산이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돌아온 집이 새롭다. 이 새로움이 에너지가 되면 족하다. 여행은 새로움의 발견이 아니라 우리집의 재발견이라는 것이 좀더 합리적인 사고인 듯 싶다. 집이 새로워지고, 내 삶도 그러하니 그것으로 여행의 목적에 만족한다. 새롭게 운동화끈을 매자. 다시 출발선에 서서 언제나 정성을 다해 일상을 달릴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 2019년 부산여행은 충분히 가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