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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형 Sep 07. 2017

사회복지, 이제는 사회적 역할을 세우는 일을 고민하다.

- 마광수 교수의 죽음 앞에서 -

90년대에 예술과 외설 사이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한 사람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국문과 마광수 교수다. 약관의 나이에 화려하게 교수에 오른 그는 늘 새로운 장르로 문학을 변혁시켰다. 그 가운데 그의 저서 몇권은 시대를 너무 앞선 탓에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가가 아닌 외설스러운 자로 회자되는 신세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명성과 재능에 비해 타자가 인식하는 마광수의 작품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욱 덧없고 아쉽기까지 하다. 이 자리를 빌어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




필자는 마광수의 생애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한 지식인의 죽음을 통해  이제는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사회적 역할 상실' 이라는 의제를 논하고자 함이다.

필자는 근래들어 '사회적 역할 상실'이 개인에게 주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던 차였다.


역할은 소위 직업에서 시작된다. 사회에서 직업은 노동을 기반으로 생산되기 마련이다. 노동의 질과 양을 떠나 노동을 기반으로 직업은 한 사람의 생을 표현한다. 노동은 직업을 통해 구현되며, 이는 사회적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인을 정의한다. 이렇게 정의된 개인은 사회적 역할에 대한 댓가를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물론 사회적 관계를 통해 사회속의 인간으로 상호작용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필자는 마광수 교수의 죽음을 '사회적 역할의 상실에 따른 우울한 결과' 로 해석하고자 한다. 정년퇴직한 교수의 극단적인 선택에는

분명 어떤 기재가 작용했을 것이다. 생각만큼 죽음이라는 카드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명문대를 정년 퇴임한 교수의 죽음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교수라는 사회적 역할이 상실된 직업인의 쓸쓸한 최후 말이다.




평생 직장의 개념이 흐릿해지는 근래에 정년을 해서 퇴직을 하든,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사직을 하든 우리는 주변에서 사회적 역할이 상실된 이들을 쉽게 보곤한다.  그러나 쉽게 보인다고 해서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이유인 즉, 이들은 소위 사회적 역할 상실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어깨위에 올린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쳐져있고, 드러나기도 쉽지 않으며, 자기 주장 역시 선뜻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의 복지프로그램은 '사회적 역할 상실'에 대한 대처나 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의 복지는 상당부분 전달(delivery)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달은 복지서비스 이용자를 성장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고민할 것은 사회적 역할이 상실되거나 손상된 개인을 대상으로 어떻게 이를 재구성하느냐, 그래서 한 개인이 사회에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성찰하는 것인지 모른다. 역할의 상실을 보전해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지프로그램은 역량강화라는 이름으로 이용자를 사육하는 시스템일지 모른다.


사회적 역할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온전한 특성과 현상을 읽어야하며, 욕구 이면의 욕망까지 볼 수 있는 눈도 요구된다. 또한 제도나 정책 역시 전달과 변화에 초점을 둔 것에서 좀더 형이하학적인 만져지는 서비스로의 전환마저 요구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선행되어져야 할 것은 사람은 누구든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고, 수여될 때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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