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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May 31. 2021

취준생이 아닌 예술가

취준생을 그만둘 의무에 대하여

# 탈락

오늘도 어김없이 오디션 탈락 문자를 받았다. 오디션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달받으면 나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 '나를 떨어뜨리고 얼마나 잘 되나 보자'는 생각과 함께 대성공할 미래를 그리며 정신승리.

두 번째, '나는 쓰레기야. 나까짓게 뭘 하겠어'하는 생각과 함께 좌절과 실패의 쓴맛을 곱씹으며 의욕상실.


보통은 이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하루 이틀 방황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가끔 정말 기대했던 오디션이거나 정말 원했던 작품에서 떨어졌을 땐 '왜 선택받지 못했는지' 궁금하고 답답한 마음에 조금 더 용기를 내본다. 내 오디션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연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상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배우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상 결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어라,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채용인원으로 인해 이번 채용엔 모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탁 친다.

'아, 저 말이 이 말이구나. 결국 난 여전히 취준생이었던 거네.'


결국 염치 불고하고 바쁜 스탭진을 귀찮게 해서 받아낸 피드백이 '못 뽑아줘서 미안하지만, 너는 아니다'라는 말을 최대한 예의 있게 해 주신 거라는 걸 깨닫고 다시 고민에 빠진다.



# 엇갈리는 만남

탈락한 오디션은 항상 아쉽다. 내 모든 행동과 말들이 하나하나 후회가 된다.

'아 그때 왜 그랬을까' '그 말은 하지 말걸. 다르게 말할걸' '괜히 밝은 척했나' '아 좀 더 가볍게 할걸'


나를 더 미치게 하는 것은, 오디션의 선발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나를 뽑아주는 사람이 뭘 원하고 기대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날은 정말 그날의 기분대로 한다. 좀 처지면 처지는 대로, 내 평소 텐션대로 솔직하게. 그러다가 떨어지면 어느 날은 밝게 해 본다. 힘든 촬영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밝고 겸손한 면을 꺼내본다. 그러다가 떨어지면 이제 혼란스럽다. 그러다가 집으로 가는 빨간 버스를 기다리며 문득 깨닫는다. 내가 순발력 있고 유연해야 할 곳에선 센치한 척하고, 좀 침착하고 분위기 있어야 할 곳에선 밝고 명랑한 척했다는 걸. 에라이.


도대체 어쩌라고, 나보고


# 취준생이 아닌 예술가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운 좋게 좋은 생각들을 만난다.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생각들.


하나, 탈락시키는 것도 존중이다.

'연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지 결이 맞지 않아서'라는 나를 탈락시킨 사람들의 하얀 거짓말 속에서 나는 '존중'을 찾아낸다. 뽑는 사람이 보기에 나는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연주는 이연주의 연기 방식, 이연주의 캐릭터, 이연주의 삶, 이연주의 태도가 있으니 본인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작품에 미련 가질 수 없도록 나를 확실하게 거절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 같은 무명 배우는 당장에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한 마음에 '나와 좀 안 맞아도, 내가 맞추지 뭐'하는 마음으로 앞뒤 안재고 나를 불러주는 곳이면 불나방처럼 뛰어들 준비를 한다. 그런데 뽑아주는 사람들이 나의 '척'에 속지 않고 잘 파악해서 떨어뜨려 주니 당장엔 아프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소중한 나의 시간과, 마음이 제대로 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두 어개의 직장도, 몇 번의 아르바이트도 '이 정도는 감수하겠다, 참을 수 있다, 내가 맞추겠다'라고 나와 회사를 속이고 들어갔지만 결국 뛰쳐나온 경험이 있으니 이제는 애초에 맞지 않는 일이면 탈락되는 게 낫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둘, 취준생 말고 예술가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내가 연출가라면 어떤 배우와 작업하고 싶은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인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인가.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사람인가, 관객을 틀 밖으로 인도해주는 사람인가.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는 사람인가, 자기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인가.

나는 취준생인가, 예술가인가.  


예술가가 되자.

취준생이 나빠서가 아니라, 4년 전 어느 밤 이후 더 이상 취준생이 아닌 예술가로 살기로 '스스로 마음먹었으니까'. 그 결정을 나 스스로 존중할 의무가 나에게 있다.


202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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