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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Sep 06. 2024

시간을 타고, 영월

때때로 시간을 붙잡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무한했으면. 과거가 되지 않았으면. 하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새들의 날쌘 비행처럼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바라는 무의미한 욕심은 특히 여행 중 그득그득 생긴다. 도파민 그 이상의 행복. 행복이 눈에 보이는 무언가라면 한 아름 안고 미소 짓는 시간이 곧 여행이다. 모든 것이 진하게 익어가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닮았다. 과수원에서 붉게 물들어 존재감을 뽐내는 사과를 하나 둘 따서 소쿠리에 담는 것처럼 여행을 다니며 정점에 달한 즐거움을 하나 둘 마음에 담는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던 시절의 조각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또한 열심히 마음에 담은 덕분일 거다. 꺼내고 싶을 때 마음껏 떠올린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은 무엇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또 미래는 어디부터 미래인 건지 모호한 채로 완결을 향해 간다.

사람은 이처럼 새로운 시간에 끊임없이 안녕을 고하지만, 이 땅에게는 시간을 붙잡는 게 허락된 모양이다. 

시간이 멈춘 어느 땅을 만났다.




단편을 이어 긴 서사를 완성하는 연작(連作)이었다.

몇 년 전, 다른 지역을 가는 길에 잠시 영월을 들른 적이 있다. 다른 풍경은 제대로 보지 못했고 서부시장에서 전병만 사 먹고 떠났던 날. 엄마와 함께 썰은 김치를 김밥 속처럼 가득 넣어 말아 부친 전병을 먹고는 깜짝 놀랐다. 전병이 원래 이런 맛이었나? 김치 만두 속을 먹는 것 같으면서도 쫀득한 메밀 피가 감자떡 같았던 기다란 음식을 먹는 동안 영월이 마음에 가득 들어왔다. 산과 강을 끼고 있어 메밀이 쌀보다 더 잘 자랐다는 땅에서 시작된 영월표 전병의 역사는 연작 중 하나였음을 이번에 영월을 여행하면서 깨달았다.

소리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동강의 곡선 앞에 우뚝 선 비밀의 문.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두 바위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듯하다. 그 사이를 걸으면 마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이미 시간여행자가 된 걸까. 

선돌 동쪽 하늘에는 태양이 천천히 내려앉아 하루를 마감한다. 오늘 하루는 마무리되지만, 이 풍경은 몇 년 몇십 년 뒤에도 이곳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같은 감동을 전할 거다.

영월에서 가장 경이로웠던 순간은 앞에 사람이 서 있으면 "으악" 부딪혔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본 은하수였다. 구불구불 고개 하나를 넘기 직전, 산의 구부정한 등 위에서 올려다본 은하수는 하늘 또한 우주의 일부라는 걸 직접적으로 알게 해 줬다. 지구 밖 다른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을 천장 삼아 살고 있음을 이해한 시간이었다. 우주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우주에 갈 수 있으면-' 따위의 가정을 심은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그 질문은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뭐 할 거야?'와 같은 농담 99.99%의 대화다. 그런데 당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땅 위로 촘촘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길을 만들고 별자리를 만드는 은하수를 보고 있으니 그런 가정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더라. 이미 우주 속에 있는데 어딜 간다는 걸까.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림을 만드는 별자리와 이따금 떨어지는 별똥별. 인간이 만드는 마천루 빛은 빛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자연의 깊이란. 고무고무 열매를 먹은 만화 속 주인공의 팔도 저 우주의 끝에는 닿을 수 없을 거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이제 구불구불 올라가는 소나무와 단종의 집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너는 데에 삼 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강이 타임머신이라도 됐던 것인지. 청령포 안은 강을 건너기 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단종의 유배생활 터였던 단종어소와 울창한 소나무숲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단종의 고독이 공기처럼 퍼져있음을 느꼈다. 훅- 다가오는 쓸쓸함. 작은 집 터 밖에는 키 큰 소나무와 풀숲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하루만 있어도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기분이 느껴지겠구나. '그 시대도 참 대단하네. 유배지로 쓰기 딱 좋은 땅을 잘도 발견했어'라며 텁텁함을 내뱉었다.




시간이 멈춘 건지 지나간 시간이 있는 곳으로 내가 여행을 다녀온 건지 헷갈리는 땅이었다.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곳. 끝끝내 영원히 남아 있는 곳. 선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동강. 청령포의 고요한 숲. 그리고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들을 다 누리기엔 인생은 짤막하다. 그래서 조물주가 인간에게 기억력을 선사했나. 아쉬운 대로 꺼내고 싶을 때 언제든지 꺼내라고. 기억을 최대한 부스러기 없이 붙잡으라고.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내내 깊이 들이마시고 살라고. 이 땅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잡아보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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