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1편
삶은 언제나 죽음과 닿아 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커피를 마시고, 회사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조용히 죽음을 생각한다.
숨은 쉰다. 걷기도 한다. 웃기도 한다.
그런데 내면 어딘가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문장이 불쑥 솟아오른다.
그리고 어떤 날은 그 말이 진짜가 된다. 몸이 따라간다.
그렇게, 죽는다.
우리들은 그것을 ‘자살’이라고 부른다.
그 죽음은 갑작스럽지만, 결코 단번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건 오랜 침묵의 축적, 고통의 누적, 의미의 소실, 공감의 결핍, 자기 해체의 연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가수 종현.
그는 유서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그 문장에는 고장 난 기계처럼 살고 있었던 한 인간의 절규가 담겨 있었다.
빛나는 무대 위의 아이돌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누군가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라는 감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미워했고, 사랑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견디려 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이것은 단지 연예인의 이야기인가?
전혀 아니다.
그는 그저 '보이는 존재'였을 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종현들이 지금도 곁에 있다.
배우 이은주.
그녀는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내가 아니니까.
이 짧은 문장은 자아의 분열, 사회가 부여한 역할과 내면의 간극,
그리고 그 틈을 메우지 못해 무너진 존재의 흔적이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상태.
이 말은 자살을 결심한 수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정서다.
눈을 뜨고 있지만, 이미 죽어 있다는 감각.
걷고 있지만, 이미 마음은 무너졌다는 고백.
정치인 노회찬은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며 스스로에게 벌을 내렸다.
대통령 노무현은 “나로 인해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며 “운명”이라 말하고 떠났다.
이들은 죄를 짓고 자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자기 책임에 대한 도덕적 자의식이 강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자의식이 너무도 예민했기 때문에, 세상의 질타가 닿기 전에
스스로의 윤리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자의식의 파열이었다.
기업가 김정주.
16조 자산의 넥슨 창업자.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람 중 한 명.
그는 '돈은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을 남기고 떠났다.
아무리 많은 숫자를 가져도, 그것은 마음에 닿지 않았다.
심장은 뛰었지만, 감정은 메말랐다.
허무.
성공 뒤에 찾아온, 의미 없음.
그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얼굴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름들.
뉴스 한 줄로 지나가는 사람들.
시골의 작은 국숫집 주인, 자식들 등록금이 없어 유서를 남긴 어머니,
주식에 투자했다가 수억의 빚을 지고 모텔에서 목숨을 끊은 평범한 아버지.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가장 가까운 얼굴이다.
직장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식당에서, 우리가 매일 마주쳤던 바로 그 얼굴들이다.
자살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만든 사회 구조의 가장 취약한 고리에서 터지는 파열음이다.
그것은 성적표일 수 있고, 계좌 잔액일 수 있으며, SNS의 댓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지, 수치심, 공허, 분노, 절망, 죄책감, 비교감정의 총합이다.
자살 후, 남은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러나 자살은 '선택'이 아니다.
어느 순간, 모든 감정과 고통이 하나로 엉겨 붙어
그 사람을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였을 때,
그 끝에 있는 하나의 문.
그것이 열려 있었고, 그가 그 문을 통과했을 뿐이다.
그에게는 그것 말고는 출구가 없었다.
그들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너진 것이다.
그들은 무력해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총합에 눌려 쓰러진 것이다.
그들은 충분히 싸웠다.
많이도 버텼다.
그리고 끝내, 너무 무거운 감정을 들고 바다에 빠진 것이다.
배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것이 아니다.
바다가 그들을 삼킨 것이다.
이제, 사라진 그들에게 물을 수 없다.
왜 떠났는지, 왜 살 수 없었는지.
하지만 그들의 유서와, 남겨진 자들의 삶, 반복되는 사건들은
하나의 물음표를 우리 앞에 세운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과 멀지 않은가?
자살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여기, 지금, 우리들 안에 있다.
문제는 단지 자살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 자살이 오기까지의 긴 시간,
표출할 수 없었던, 그래서 밖으로 내놓지 못한 감정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은 마음의 흐름이다.
사회는 그리고 우리들은,
통계로, 사건으로, 연예인의 죽음으로 자살을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혹은,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오늘일 수도 있다.
자살은 외딴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만든 문명사회 위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는 균열이다.
그 땅 위에, 우리는 함께 서 있다.
때문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죽음에 손을 뻗는 사람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 손을 뻗지 않게 만드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그 세계는,
서로 경청하고 공감하고 함께하고 삶의 흔들림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살은 누구의 얼굴인가?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의 얼굴이었다.
바다 위에 흔들리는 배처럼, 우리 모두는 떠 있고,
서로가 서로의 등불이 될 수 있다면
그 배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다음은 자살론 2편. '성취와 공허-모든 것을 이룬 자들의 허무'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