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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혼자 사는 남자 Mar 15. 2023

에니어그램 5번, 혹은 '사차원'

“창백한 지식의 길을 따르기보다 땀과 피로 얼룩진 생생한 삶을 따라야 하리라. 진짜로 산다는 것은 광활한 바다 위에서 폭풍과 파도와 싸우며 떠도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갖고 앞을 향해 내닫는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만나 좌초하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만나 좌초하고, 때로는 비탄에 잠기고, 때로는 성애(性愛)의 열락 속에서 헐떡인다. 이것이 인간이다. 암, 그렇고 말고!”

『조르바의 인생수업』, 장석주.     


에니어그램이라는 게 있다. 13세기 중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구도자들이 자신의 에고를 이해해서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을 얻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현대에는 자기 이해와 대인 관계 개선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쓰인다. 성격 판별 도구로 MBTI가 많이 알려져있지만, 내가 보기에 에니어그램도 MBTI 못지않게 각각의 성격 유형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제공해준다.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 유형을 크게 9가지로 나눈다. 난 전형적인 5번 유형이다. 5번 유형은 한마디로 삶에서 떨어져 나와 삶을 관찰하는 유형이다. 실제로 삶에 뛰어들기보다는 끊임없이 삶을 관찰하는 유형이다. 삶에 직접 뛰어들기보다는 삶을 관찰하고 삶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걸 좋아한다. 삶에서 떨어져 나와서 끊임없이 그걸 관찰하다 보니 삶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삶에 직접 뛰어들지 않다 보니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나이브’(순진한) 경향이 있다.          


5번 유형의 강점은 상황에 직접 뛰어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삶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보니, 오히려 삶에 밀착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보다 옆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오히려 판세를 더 잘 읽어내는 이치와 같다. 이렇다 보니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통찰력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성숙한 5번 유형은 학자나, 현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5번 유형은 단점도 분명하다. 5번 유형들은 자발적으로 은둔하여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소통이나 정서적 교감 능력이 매우 서툰 경우가 많다. 삶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 떨어져서 관찰만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어떤 의미에서 삶을 실제로 산다고 보기 힘들다. 삶을 살지 않고, 구경만 하는 것이다. 가령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키우고, 인간관계도 많이 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직접 삶에 뛰어들어 살을 부비며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5번 유형의 인간들은 자칫 ‘사차원’이나, ‘몽상가’가 되기 쉽다.      


나만의 공간에 붙박혀 책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고, 영어공부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삶이 내 손아귀에서 많이 빠져나갔다. 내일 모레면 벌써 쉰이다. 나이 치고는 꽤 젊어보이던 얼굴에도 어느새 주름이 많이 생겼다. 새치도 많이 늘었다. 30대 후반만 해도 택시기사들이 슬쩍 반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기사들이 무척 정중하다. 삶에 대한 탐색을 마치고 ‘이제야 삶을 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벌써 삶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친구들과 난 걸어서 1시간이 되는 강에 멱을 감으러 갔다. 친구들이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물속에 뛰어드는 중에 난 물가에 머물면서 강가를 둘러보고, 물속을 살폈다. 이 장면은 마치 내 인생의 축소판 같다. 친구들이 삶에 뛰어들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동안 난 여전히 주변을 맴돌며 이것저것 살피고 주저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도 많이 늙었다. 창백한 지식의 길을 따르기보다 땀과 피로 얼룩진 생생한 삶을 따라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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