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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혼자 사는 남자 Mar 18. 2023

알고보면 따뜻한 남자

내가 어릴 적에는 초등학교 앞에서 어묵을 팔았다. 그때는 막대 어묵 한 개를 반으로 잘라서 20원에 팔았다. 용돈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사 먹을 일이 거의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사 먹는 모습은 자주 지켜보았다. 요즘에는 작은 간장 그릇에 간장을 덜어서 먹지만, 그때는 큰 간장 그릇을 하나 갖다 놓으면 아이들은 하루종일 그 그릇에 어묵을 찍어먹었다.       


오후가 되면 간장 표면에 야릇한 부유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옆에서 구경만 하던 내게 미안했던지, 친구들은 가끔 “한 입 줄까?”하며 먹던 어묵을 간장에 찍어서 내밀었지만, 나는 거절했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간식이라고는 못 먹고 자랐지만 지저분한 음식은 싫었다. 비록 소량이기는 했겠지만, 그 간장에는 반드시 다른 아이들의 침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 시골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멀리 있는 주왕산으로 직원 여행을 떠났다. 그때만 해도 직원 여행을 가면 관광버스 안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는 했다. 같은 학교에 89학번 선배가 있었는데, 결혼을 한 지 7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 집안의 장손이라 부모님이 아이를 많이 기다리신다는 말을 선배는 평소에 자주 했다.

      

이 선배가 술에 취하자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사정을 잘 알았던 후배 교사들은 그 선배를 달래주었다. 오는 상주 인근 기사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된장찌개였다. 그 선배는 된장찌게에 밥을 비벼놓고는 후배들을 불렀다. 나는 그 학교 동문 중에서 제일 막내였다. 내 위로는 5명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비빈 밥을 한 숟가락씩 퍼서 학번 순으로 떠먹여 주었다. 나는 제일 나중에 먹었다. 선배는 다정하게도 숟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한 번 빨고 나에게 한 숟가락 퍼먹여 주었다.    

 

내가 어지간히 털털한 남자였다면, 이런 기억이 마음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까다로우셨던 아버지를 닮은 까닭인지 나도 남자치고는 꽤 까다로운 편이다. 혼자 살면 김밥이나 라면 따위로 끼니를 대충 때우기 쉽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무농약 식자재를 사서 건강식을 하는 편이다. 외식을 할 때도 깨끗한 식당이 아니면 들어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이었다. 마을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곧 함박눈으로 변해서 쌓이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며 놀고 있는데, 멀리서 엄마가 리어카에 무엇인가를 가득 싣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급히 친구들과 놀이를 파하고 난 곧장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엄마는 그때 고추를 빻으러 읍내 방앗간이 가는 길이었다.       


그 시절에는 거의 그랬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셔서  번 돈으로 여섯 식구가 호구를 했다. 예전에는 쌀통이라는 게 있었다. 세탁기처럼 생긴 물건이었는데, 쌀통에 쌀을 넣어 보관하면 벌레가 잘나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쌀통이 없었다. 그래서 쌀에서 벌레가 자주 낫다. 엄마는 밥을 하러 살을 씻을 때마다 유심히 살폈지만, 가끔 밥에서 쌀벌레가 나왔다. 밥에서 벌레가 나오면 엄마가 아버지에게 혼이 나니까 난 그걸 밥그릇 뒤에 몰래 숨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밥을 먹고는 했다.      


교사생활을 시작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다. 출근길에 안개가 자욱했던 걸로 봐서 아마 시월 말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고향 인근 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나는 그날도 일찍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을 지나 우리 교실이 있던 3층으로 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키보다 한 참 높은 창문에 잠자리가 날개를 부딪치고 있었다. 전날 창을 열어두었을 때 들어왔다가 창을 닫아 버리자 미처 나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 교실로 가서 의자와 책상을 가지고 와서 책상 위에 의자를 놓고는 창을 열어주었다. 안개가 자욱한 하늘로 사라지는 잠자리를 보면서 그날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했다.      


내 첫인상은 대체로 무미건조한 모양이다. 사람들은 듣기 좋게 “학자 스타일이다.”, “지적이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재미없게 생겼다.”, “ 차갑게 보인다.”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는 안다.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매일 하는 일은 책 읽기, 글쓰기, 영어공부, 명상 따위다. 허구한 날 그런 일이나 하고 있으니, 그런 분위기가 묻어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인상이 내 전부가 아님을 안다.       


어린시절 개구리 뒷다리를 잘라서 삶아 먹기도 하고, 잠자리 날개를 자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교실에 들어온 말벌도 가급적 살려서 보내준다. 비 오는 날 도로 위에서 뒹구는 지렁이도 풀밭이 놓아준다. 파리도 가급적 때려잡지 않는다. 어지간히 성가시지만 않으면 그냥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려준다. 나도 알고 보면 따뜻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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