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구조라항 앞 온실 카페를 통해 보는 또 하나의 외도 보타니아
남해안에서 노을 지는 바다에 앉으면, 내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보며 감상에 젖어들게 된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인연들과 과거로부터 멀어진 관계들이 떠오른다. 기억 속에서 하나둘씩 피어오르는 사람들의 얼굴. 해안가를 떠나가는 파도 하나에 그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운 마음을 실어 보낸다. 파도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지평선 너머로 마침내 당도할 테다.
나의 안부를 전해 받은 그대의 얼굴을 또 한 번 그려본다. 떠나갔던 파도 하나가 그대의 서신을 실어 다시 내 발 끝으로 돌아온다. 철썩... '난 잘 지내고 있네.', 철썩... '그대도 행복하시게.'. 나와 그대가 주고받았을 마음의 편지 한 편이 완성된다. 가슴에 묻어둔 감정을 전하고 나면 떨리고 흥분되었던 내 마음은 파도와 함께 차분히 가라앉으며 안정을 되찾는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간단한 외출과 모임조차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한반도의 땅끝마을을 찾았다. 해안가를 따라 자동차로 이동하는 여행은 난생처음이었다. 처음 마주하기 때문에 남해안이 각별하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각 변동과 해수면 상승에 따라 생겨난 남쪽의 리아시스식 해안은 내게는 그 자체로 시적이었다.
깊은 포구와 많은 곶으로 복잡한 해안선은 금방 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지 못하는 섬들의 연속이었다. 여행 도중에 나의 발길도 거제도 구조라항 앞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 항구에서는 하루 4번 외도로 가는 배가 출항하는데, 내가 여행했던 시기에 코로나로 인해 일시적으로 외도 해상농원인 '보타니아' 출입이 금지되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발길이 멈춘 거제도에서 조금 더 머물러 보기로 했다. 구조라 유람선의 선장님으로부터 항구 근처에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가 만든 정원 카페 '외도 널서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카페 이름에 쓰인 널서리(nursery)라는 단어는 식물을 가꾸는데 필요한 씨앗, 흙, 꽃, 화병, 모종삽 등을 파는 원예점을 의미했다.
어쩐지 설립자라는 말에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은 일단 카페로 이동한 뒤 생각하기로 했다. 항구에서 바로 뒤를 돌아보면, 골목 어귀에 새빨간 건물의 '바람곶 우체국'이 있었다. 그 우체국 바로 앞에는 적색 벽돌로 담장을 쌓아 올린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다. 선장님이 소개해주신 카페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벽돌의 한 면에는 직원들만 통할 수 있는 조그만 흰색 철문이 있었다. 그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방문객이 출입하는 초록색 대문이 보였다. 대문을 통해 카페로 가는 길은 크리스마스트리로 자주 쓰이는 상록 침엽수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심겨 있었다. 마침내 온통 유리로 이루어진 뾰족한 삼각형 지붕의 온실이 보였고 이곳이 바로 카페 본관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건물과 지붕의 뼈대들이 두툼한 나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 기둥들은 가지가 되어 작은 화분들을 공중에 걸려 있었다. 선인상 티라미수, 몽돌 쇼콜라 등 카페의 디저트 모양들에서 조차도 어느 한 군데 빠짐없이 이곳의 정체성은 화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유리창을 통해 내리쬐는 태양 빛으로 실내가 뜨거워지지 않도록 천정에는 아이보리색 커튼이 유리창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여닫는 문에 실내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 바람에 천이 나부끼면서 카페 테이블 위로 햇살이 아른거렸다.
본관을 통과하면 카페 밖으로 다양한 꽃들이 심겨 있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구조라 해변과 맞닿아 있는 야외 테라스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방문한 날은 하늘이 유난히 맑았는데, 배로 가지 못하는 외도일지도 모르는, 해안가 멀리 다른 섬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오후 4시가 지나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붉은 노을로 물드는 하늘을 배경 삼으니 파도 소리만 감상하는데도 심심하지 않았다.
외도에 가지 못한 덕분에 만나게 된 또 하나의 절경. 부서지는 파도와 섬들에 부딪히며 깎아진 절벽을 오래 관찰하던 내게 그리움의 감정이 밀려왔다. 어느새 노을을 바라보면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 밖으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도시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기 때문일까? 그리움의 파도에 휩쓸려 너울 치는 나의 감정, 더 깊은 그리움으로 빠져들어가는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미치도록 소중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궁금증을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 한 분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외도 보타니아는 정부가 아닌 개인이 40년 동안 가꾸어낸 곳이다. 1970년대 이창호 씨가 이 섬을 매입하여 아내인 최호숙 씨와 약 15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섬 전체를 정원으로 가꾸었고, 1995년 처음 개장하여 외부인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 후 2002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유명해졌고, 한 해 최다 방문객이 2천만 명이 넘어섰던 때도 있었다. 남자 주인공 '준상'과 여자 주인공 '유진'이 가슴 아픈 이별 끝에 재회하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곳이 외도였다니, 그리움이 단지 나만의 감상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아련하고 애틋한 자기만의 그대를 떠올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코로나가 끝났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외도 보타니아에 다시 가보지 못했다. 일부 독자들은 나의 상황을 알고 있을텐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분간 장시간 운전과 장거리 여행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면서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운 계절이 돌아왔다. 오늘의 기분으로 말미암아 외도 보타니아 사진을 다시 한번 찾아보게 되었다.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인 이창호 씨는 2003년 작고하셨고, 현재 외도 보타니아 회장은 최호숙 씨가 맡고 있다. 벤베누토 정원, 비너스 가든, 조각타일로 꾸며진 방파제로 유명한 외도이지만, 나는 이 섬에 세워진 비석에 쓰인 글귀에 더욱 눈길이 간다. 돌아가신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를 기리며 부인과 다른 가족들이 한줄씩 써내려 갔을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를 끝으로 나의 에세이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한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그리워하는 우리를 여기에 남겨두시고
그리움의 저편으로 가신 당신이지만
우리는 당신을 임이라 부르렵니다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지만
나와 함께 가자는 말씀도 없이 왜 그리 급히 떠나셨습니까
임께서는 가파른 외도에 땀을 쏟아 거점이 되게 하시였고
애정을 심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지게 하시었으며
거칠은 숨결을 바람에 섞으시며 풀잎에도 꽃잎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더하고픈 말씀은 침묵 속에 남겨두시고 주님의 품으로 가시었으니
임은 울지 않는데도 우리는 울고 있고
임은 아파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아파하며
임의 뒷자리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