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홋카이도] 넷플릭스 '퍼스트 러브' 촬영지(스포일러 포함)
눈은, 언제나 그랬듯이, 몰래 온 손님처럼 모두가 잠에 든 밤새 내렸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낙엽이 지고 앙상하게 비어있던 나뭇가지를 보면 왠지 마음이 쓸쓸했는데, 겨울의 선물이 텅 빈자리를 소복이 채워준다. 집 밖으로 보이는 도로, 공원, 나무들이 눈에 포근히 안겨 있다. 나는 당장이라도 눈의 세계로 달려 나가고 싶어졌다. 어린아이처럼 잠옷 바람에 패딩만 걸치고 집 밖으로 뛰어 나가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어지럽혀지지 않은 도화지 같은 풍경을 바라봤다. 깨끗한 도화지 위로 조심스레 내디뎌 보는 첫 발걸음. 설레는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이 조용하기 때문인지, 눈을 밟을 때마다 생겨나는 소리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뽀드윽, 뽀드득, 뽀득...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내가 지나온 발길의 형상이 그대로 눈길 위에 남았다. 다른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되면, 내가 그려 놓은 그림이 고스란히 남아있지 못할 테지. 그래서인지 발자국을 남기는 것만으로는 눈을 완전히 즐겼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눈 위로 몸을 던져 누워볼까? 등과 팔로 비비면서 눈을 만지고, 눈밭에서 뒹구는 상상을 해본다. 차마 그렇게 까지 해 볼 용기가 나지는 않는다. '정신 차리고 출근 준비하러 다시 집으로 들어가야지.' 이성을 되찾고 뒤를 돌아봤다. 내가 남겨 둔 발자국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처음 시작된 발자국의 모양이 내가 서 있는 곳에 가까이 있는 발자국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발걸음의 간격이 넓어져 있고, 발자국마다 점점 깊이가 얕아져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첫눈이 주는 풍경에 익숙해지고, 눈에 대한 환상에 대해 무덤덤해지고 있는 내가 보였다. 동심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끝나고, 어느새 출근길을 걱정하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길가의 수풀 위에 쌓인 눈을 한주먹 쥐어 보았다. 처음에는 손 안으로 들어오는 보드라운 눈의 질감이 좋았다. 그런데 맨 손으로 눈을 계속 쥐고 있자니 손끝이 시려서 버티기 어려웠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뭉치를 바닥에 떨구었다. 분명, 눈이 내린 마을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온기가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이 차갑게 느껴진다. 아니 실제로, 눈은 차가운 것이다. 기온이 섭씨 0도 아래로 떨어지면서 구름 안의 물 입자나 대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서 눈으로 결정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눈. 눈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의 대립되는 성질에 따라 이리저리 감정이 헤엄칠 때면, 일본 드라마 'First Love(퍼스트러브)' 속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노구치 야에'는 홋카이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10대 학창 시절을 보낸다. 그녀의 꿈은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나미키 하루미치'는 중학교 3학년까지 불량학생이었지만 기차역에서 그녀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하고, 그녀가 진학할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벼락치기 공부를 한다.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하루미치'는 어설프지만 순수한 고백으로 '야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사귀게 된다.
사랑에 빠진 '하루미치'는 '야에'가 어느 날 하늘을 나는 전투기를 보며 "멋지다."라고 내뱉은 한마디로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파일럿의 꿈을 키운다. 도쿄의 대학교에 진학한 '야에'와 자위대에 입대한 '하루미치'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면서 홋카이도의 눈 덮인 언덕에 타임캡슐을 묻고 10년 뒤 열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하루미치'와 다툰 날에 '야에'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이 생긴다. 가난한 가정의 별 볼 일 없는 '하루미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야에'의 어머니는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도록 둘의 사이를 막아선다.
과거 기억을 잃어버린 '야에'는 주치의였던 '코사카 유키히토'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야에'는 자신의 꿈을 접은 채 대대손손 의사 직업을 가지며, 명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 둘 사이에서 '코사카 츠즈루'라는 아들을 낳고 행복할 줄만 알았던 그녀의 결혼생활은 기쁘지 않았다. 기대치가 높은 시댁에 눈치를 보며 살던 '야에'는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게 된다. 자신의 경제 수준으로 아들마저도 키울 수 없게 되자, '야에'는 상실감과 좌절 속에 살면서 삿포로에서 택시운전사를 한다.
'하루미치'는 사고 후유증으로 파일럿을 못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흘러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 당시 군에서 자신의 정신과 상담인이었던 '아리카와 츠네미'와 사귀면서 마음에 내키지 않은 결혼을 약속했다. 상견례 당일, 삿포로에서 우연히 택시에 타고 있던 '야에'를 발견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이 흔들린다. '야에'가 자신을 알아볼까 기대에 차 있던 '하루미치'는 자신이 관리하던 건물에 자주 찾아오던 '츠즈루'를 통해 그 아이의 엄마를 만나게 된다.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야에'를 만났지만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그녀 주위를 자꾸 맴돈다.
'야에'는 왠지 모르게 '하루미치'에게 끌리고, 자신을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표현이 싫지만은 않다. 그의 약혼녀 '츠네미'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하루미치'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그가 언제든지 자신의 옆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하루미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는 현실을 떠나 아이슬란드로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야에'는 '하루미치'가 아들 '츠즈루'에게 선물한 CD플레이어를 발견하고 우타다히카루의 노래 'First Love'를 듣게 되면서 잃어버렸던 모든 기억이 되돌아온다. 기억이 돌아온 '야에'는 '하루미치'를 찾아가고, 둘은 재회하면서 드디어 아이슬란드에서 비행기 승무원과 파일럿의 꿈을 함께 이룬다.
드라마의 줄거리만으로 매료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기억상실을 소재로 하는 스토리라인은 다소 상투적인 부분도 있다. 하지만 청춘, 자유 그리고 사랑에 미쳐있던 시절을 눈 오는 홋카이도의 풍경을 통해 담아내는 데 있어 영상미가 매우 훌륭하다. 홋카이도 설경에서 남녀주인공이 서로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꿈을 재단하지 않고 아무 조건 없이 응원하는 모습을 그려냈기 때문에 순수함은 절정에 달한다.
순수함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어서 좋다. 그래서인지 내게 어떠한 이유가 생겨난 뒤로 순수함을 잃고 있는 것 같아서 서글프다. 내가 현실적인 삶에 치이며 중심을 잡지 못할 때, 그건 내 안에 순수한 마음이나 동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일까 의심하게 된다. 삶의 중요한 조각 하나를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텐구산에 올라가면 그 퍼즐을 찾을 수 있을까?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창밖을 보고 있자니,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순수한 열망도 커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