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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22 3cycle Ⅳ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22 3cycle Ⅳ





 답답할 때 늘 하는 짓이 있다. ‘가까운 누군가에게 메시지 보내기.’ 이번에는 공보의 시절 종종 친 땡땡이를 많이 눈감아 주었던 예진 쌤이었다.



동완 : 경과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좋으면서도 안타까운 그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예진 : 왜요? 무슨 이야기?

동완 : MRI 영상으로는 흉터인지 병소인지 확인이 불가능함. 그리고 남은 3cycle 끝나면 그냥 치료가 종료되고, 그 후로 3개월마다 다시 촬영해서 늘어나나 안 늘어나나만 확인. 이 상태네요.

예진 : 아항.

동완 : 그래서 ‘치료가 끝나는 것’. 이 자체에 그렇게 큰 의미가 없더라구요. 한 마디로 지금이나 3개월 뒤나 1년 뒤나 면담 상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똑같다는 말. ‘다음 3개월 뒤를 봅시다.’ 이 이야기만 계속 듣겠죠. 아니, 그 말 들으면 완전 다행인거고.

예진 : 뭐,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뭐 뿅 사라지고 이런 건 잘 없지 않나?

동완 : 저는 ‘획기적으로 치료 끝! 이제 마음 편히 먹어요!’ 이럴 줄 알았어요.

예진 : 에이 그런 게 어디 있나요. 다들 그냥 정기적으로 추적 관찰하면서 사는 거지.

동완 : 1년 뒤나 3개월 뒤나 지금이나 듣는 말 같으면 이제 암 환자 안 할래요. ‘병신(病身) 독립선언!’ 때마침 병신(丙申)년이니 중의적으로 표현되네. 병신년에 병신 놈팽이 되니 운명인가.

예진 : 지금부터 환자역할에서 벗어나 봐요. 원래 사는 건 드라마가 아니잖아요, 종영이 아니라. 그냥 계속 살아지는 거임.

동완 : 거참 결혼하겠나.

예진 : 결혼은 아프기 전이나 지금이나 미지수이긴 마찬가지.

동완 : 만약에 좋은 사람 만나면, 고백할 때는 이야기해야하나... ‘나, 암 환자예요.’

예진 : 상황 봐서 하면 되죠. 지금 쓰고 있는 거 보여줘요. ‘자전적 소설이다.’라고 하면서.

동완 : 저 김 작가에요. 정확히는 환자 겸 작가 겸 한의사 겸 백수라고 소개하면서.

예진 : 꼭 그런 것들 들어가야 해요? 아이덴티티가 그것뿐임? 왜 자꾸 환자에 갇히는지 모르겠어요.

동완 : 아! 맞다. 버려야지. 병신 독립 선언이 무색하네.

예진 : 환자 역할 그만한다고 한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암튼 여행 한 번 다녀와요. 마음 정리하고 그런 것에 도움될 거예요.




 승현이 형에게도 면담 당시에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여 메시지를 보냈더니, 점심 즈음 전화가 왔다.


그래, 임마 이제 주욱 관리하면서 살자.
지금까지 잘 왔다.
이제 스트레스 받지 말고 여유롭게 살아.
그렇지 않아도 언제부터 일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니까 3월을 이야기하더라구요,
f/u 때 이상이 없다고 나오면 일 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거라면서.
그래도 개원이나 부원장은 아직 좀 그러니까 기다려보고 요양병원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냐고 했어요.
앞으로 그냥 여유롭게 페이 닥터 위주로 살아야 할까봐요.
f/u - follow up, 추적검사
그래 맞다. 동완아.
남들이 돈 많이 벌고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사는 모습들 보면서 아쉽고 부럽고 신경도 쓰이고 그럴 수 있어.
안 그런 게 이상한 거지, 너도 생각해온 삶이란 게 있을 텐데, 욕심도 있고 말이야.
그런데 그걸 한 번에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지.
그렇지만 이제는 ‘내 일이 아니다. 내 길이 아니다.’ 하면서 살자.
다 각자 나름대로 길이 있는 거다. 동완아.
무엇이 더 의미가 있거나 뒤떨어진다는 건 없어.
네. 병원에서 남는 시간에 환자를 주제로 소설이나 수필 쓰면서 살다가, 대구 근교 한적한 시골에다가 한의원 조그마하게 해서 살래요.
에이, 그냥 개원 자체를 하지마.
그거 다 스트레스다.
하려면 돈 많은 집에 장가를 가든가.
소개나 시켜주고 그래요.


 평소보다 환자수가 적거나 좀 손해 본 날이다 싶으면 ‘그래 하루 늦게 은퇴하면 되지.’ 라 말하며 마음 편히 한의원을 운영한다는 동문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동생 걱정에 전화 준 승현이 형이 고마웠다.


 그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전 침대에서 끄적거려 본 메모이다.



 그래 뒤처지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자.

 지금 뒤처지는 게 아니라 다른 길을 걸어가는 거야.

 돈을 많이 버는 것, 사람을 많이 치료하는 것, 잘 치료하는 것만이 한의사로의 성공을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직업적인 성공이 아닌, 예컨대 좋은 아빠나 남편 같은 좋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성공도 성공이야.


 그리고 꼭 성공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나의 인생 목표는 소시민 중 1등이었잖아.


 다들 나를 보며 걱정했지. 너는 학자 스타일이지 사업가 스타일이 아니라고. 개원가에 나갔을 때 많이 힘들 거라고 말이야. 나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어서 불안하고 고민도 많이 했어.


 배포가 크고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는 지만이 형.

 서글서글해서 환자들에게 살갑게 대해서 인기가 많은 나기 형.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경험도 풍부한데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좔이 형.

 그냥 알아서 다 잘하는 우민이.

 그에 비해 난 너무 유약한 느낌이 많았으니까.


 선배 블로그 제작 도와주며 마케팅 공부한 건 사람 대하는 스킬의 미숙함을 메꾸어보려고 한 시도였고, 책 여러 개 붙잡고 공부하며 정리했던 건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서 임기응변에 취약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술책이었어.

치료 받고 좋아하시는 분들의 미소를 보는 것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잘 할 자신이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어.


 그래서 한의사 면허 따놓고는 빌빌거린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떨곤 했지. 그런데 이제는 그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돼. 내가 두려워한 그 길을 걷지 않고 나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


 ‘쟤는 너무 인생 소극적으로 사는 거 아니야?’ 라고 누가 말한다면 옆에서 이야기하겠지. ‘어쩔 수 없잖아. 스트레스 같은 거 조심해야 하는 거니까. 저렇게라도 하는 게 용한 거지.’ 라고.

 그래 한 마디로 난 무적의 방패가 생긴 거야. 어쩌면 주변에 평판에 잘 휘둘리는 나 같은 겁쟁이에게는 행운이야.


 예전에 나기 형이 나에게 말했어.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이 길을 선택할래.


 ‘여유로운 삶.’

비록 돈을 적게 벌지라도 오랜 꿈이었던 문학도 흉내도 낼 수 있는 이 삶에 만족하며 살래. 그 안에서 나는 못 해보았기에 더욱 하고팠던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빠 노릇을 하며 그렇게 남은 삶을 살아갈래.


 아, 그전에 내가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살 수 있어. 난 나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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